[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7] 엘리트 중의 엘리트 ‘정초(鄭招)’- <하>조선의 과학사업을 주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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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23   |  발행일 2017-10-23 제13면   |  수정 2017-10-26
[조선 문과] 태종 5년(140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을과 2위[亞元]·태종 7년(1407) 정해(丁亥) 중시(重試) 을과2등 4위
세종의 과학적 동지로 일평생…장영실과 천문관측 간의대도 제작
20171023
천문관측대인 간의대. 조선의 과학사업에 크게 기여한 정초는 장영실 등이 만든 간의대 제작을 관장했다. <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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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장원방(옛 선산 영봉리, 지금의 구미 선산읍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 출신 정초(鄭招)는 세종 초기 탁월한 업무능력을 보인 인재였다. 농사직설(農事直說)을 비롯해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을 편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 외에도 조선의 과학사업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정인지(鄭麟趾)·정흠지(鄭欽之)와 함께 ‘칠정추보(七政推步)’ ‘대통통궤(大統通軌)’ ‘태양통궤(太陽通軌)’ 등을 연구하고 역서(曆書)인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을 편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 장영실 등이 만든 천문관측대 간의대(簡儀臺) 제작을 관장했다.

#1. 최초·최고의 실용농서가 그의 손에서

‘농업이 천하의 대본(大本)이다.’ 이는 수백 년 조선을 아우른 사상이었다. 당연히 역대 거의 모든 임금이 농업을 장려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힘을 쏟았다. 세종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종은 접근하는 방식이 달랐다. 바로 ‘과학’이었다.

당시 조선에는 우리 실정에 맞는 농업 책이 없어 중국에서 농서를 들여와 활용했다. 그러다보니 기후와 토양이 다르고 벼농사 중심인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었다. 세종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다.

“풍토가 다르면 곡식을 심고 가꾸는 법도 다른 법. 어찌 중국의 옛 글을 따르겠는가. 이에 우리 형편에 맞는 우리만의 책을 펴내고자 한다.”

세종은 곧장 정초에게 명했다.

“중국의 농서를 기본으로 삼기는 하되 각 지역의 나이 든 농부들을 찾아가 그들이 경험한 바를 들어 참고하라. 그리고 그 내용을 낱낱이 살펴 확인하고, 그중 요긴한 내용만을 추려내 책으로 묶으라.”

이에 정초는 실제 농사에 필요한 영농기술은 물론 물·날씨·땅의 형세 등 각 지역에 따른 환경조건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책으로 묶었다. 그리고 1429년(세종11) 백성들에게 배포했다. 바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서 ‘농사직설(農事直說)’이었다. 이는 개인에 의해 집필된 최초의 실용농학서였다. 정초가 서문에 ‘이 책이 비록 작더라도 그 이익됨이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적은 대로 조선 농업에 있어 최고의 기본서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정초는 ‘천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절감하게 되었다. 벼를 재배하는 데 있어 기후가 그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친 때문이었다. 기후가 무엇인가. 하늘의 일이었다. 즉 하늘의 이치를 모르고서는 땅을 움직일 수 없다는 절박한 자각이었다. 세종의 생각과도 일치했다. 세종은 나라가 안정되려면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어야 하고, 그 힘은 농사의 질이 좌우한다고 믿었다. 농사의 핵심은 하늘의 이치를 얼마나 제대로 파악하고, 얼마나 적절히 운용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하늘의 이치라. 정초의 고민이 깊어졌다.

#2. 전심전력으로 우리만의 달력을

1430년(세종12) 8월이었다. 세종이 조곤조곤 의견을 풀어놓았다.

“천문(天文)은 전심전력을 다하지 않고서는 그 이치를 짐작하기가 불가능하다. 하물며 계산이겠는가. 지금껏 당(唐)의 선명력법(宣明曆法)을 써오는 동안 수없이 발생했던 오차 문제에 대해서는 경들도 잘 알 것이다. 그래도 일전에 정초가 원(元)의 수시력법(授時曆法)을 연구한 덕에 책력 만드는 법이 조금 바로잡히기는 했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자료를 쌓아 뒷날의 고찰에 대비토록 하라.”


당시 조선엔 자체적 역법·역서 없어
칠정추보·대통통궤·태양통궤 등 연구
오늘날 ‘천체력’에 가까운 달력 만들어
훗날 세종이 정초에 시호 ‘문경’ 내려



세종은 역법(曆法)에 관심이 많았다. 역법은 천체의 주기적인 운동을 살피고 예측함으로써 인간의 생활을 합리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시간의 단위 등을 만드는 법칙을 말한다. 그리고 이를 생활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달력’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는 자체적으로 연구한 역법이 없었다. 당연히 역서라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중국에서 중국 역법에 따라 만든 역서를 중구난방으로 사용할 따름이었다. 이에 세종은 역법을 연구하고, 그에 따른 역서를 출간하기로 했다. 달력을 통일해 국가 운영에 합리와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넉 달 뒤인 12월11일, 당시 총제(摠制)였던 정초를 불러 상의했다.

“책력 연구와 교정을 어찌 보는가? 애는 애대로 쓰고 실익이 없는 것은 아니겠는가?”

“여러 책을 참고해 상세히 연구하면 가능합니다.”

“든든하구나. 계산법을 연구해 초안을 작성해두라.”

하지만 정초 역시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밤낮으로 근심하느라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게다가 동료란 사람들이 정초를 받쳐줄 만큼의 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더 난감했다. 이에 정초는 평소 신뢰하고 있던 동지총제(同知摠制) 정인지를 콕 집어, 함께할 수 있게 해달라고 세종에게 부탁했다. 세종이 들어주지 않을 리 없었다.

“정인지를 보내어 정초와 함께 연구하게 하라. 그가 천문은 비록 자세히 알지 못할지라도 능히 도움이 될 것이다.”

이로써 정초는 정인지·정흠지 등과 함께 1432년부터 10여 년에 걸쳐 ‘칠정추보(七政推步)’ ‘대통통궤(大統通軌)’ ‘태양통궤(太陽通軌)’ 등의 역법과 역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이순지(李純之)와 김담(金淡) 등이 참여해 1442년에 완성, 1444년에 간행했다. 바로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이었다. 여기서 칠정(七政)은 일월오성(日月五星)을 가리켰다. 즉 해와 달 그리고 목·화·토·금·수 5개의 행성이었다. 책은 천문상수(天文常數, 천문학의 기본상수)를 권두로, 역일(曆日)·태양·태음·중성(中星)·교식(交食)·오성(五星)·사여성(四餘星) 등 7개의 대목으로 구성했다. 그리고 책의 끄트머리에는 한양을 기준으로 삼은 동지·하지 후의 일몰일출 시각과 밤낮의 길이를 표로 실었다. 단순한 달력이라기보다는 오늘날의 천체력(天體曆)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3. 땅을 움직이려면 하늘부터 알아야

1432년(세종14) 경회루 북쪽 담 안에 높이 31자(약 10m), 너비 32자, 길이 47자(약 14m) 규모의 간의대(簡儀臺)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쌓여가는 돌 더미 앞에서 대제학 정초는 좀체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칠정산내편’ 편찬과 맞물려 시작된 간의대 조성이었다. 간의(簡儀)는 천문관측기인 혼천의를 간략하게 만든 천문기기였다. 이를 통해 행성과 별의 위치, 고도와 방위, 그리고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바로 그 간의를 설치하기 위한 간의대 조성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로써 백성들이 24절기에 대한 정보를 보다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곁에서 장영실이 차분하게 의견을 얹어왔다. 장영실의 진중한 낯빛이 곤두서있던 정초의 마음에 안정을 주었다. 정초가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오.”

정초는 장영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아비가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다’가 전부였다. 하지만 장영실은 과학을 위해 태어난 인재였다. 보면 볼수록 세종의 총애가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정초는 그 장영실과 더불어 간의대를 비롯한 전반적인 과학사업을 진두지휘하는 중이었다.

특히 간의대는 종합적인 천문대로서 손색이 없는 규모였다. 부대시설도 다양했다. 우선 정확한 방향을 나타내는 정방안(正方案)을 남쪽에 두고, 해그림자를 이용해 태양의 방향과 고도를 측정하는 규표(圭表)를 서쪽에 두었다. 거기에 혼의(渾儀)와 혼상(渾象)을 비치한 작은 건물도 따로 마련했다. 혼의는 혼천의(渾天儀)로 별자리의 각도를 측정해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기기였다. 혼상은 천구의(天球儀)로 둥근 구면에 하늘의 좌표를 그려 놓고, 그 좌표에 따라 해당하는 위치에 별들과 은하수를 새겨서 별들이 뜨고 지는 것을 시간과 계절에 맞춰서 보게 되어 있었다. 아울러 혼상과 혼의는 수력을 이용한 기계를 통해 하루에 한 번씩 함께 회전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간의대는 그야말로 아주 복합적인 천문관측시설이었다. 그리고 준공과 더불어 서운관(書雲觀, 천문관측기관)의 관원 5명이 머물며 매일 밤 천문을 관측했다. 이로써 간의대는 자연스럽게 관천대(觀天臺)라는 별명도 갖게 되었다.

세종은 간의대가 만들어지는 동안 현장을 자주 찾았다. 1433년(세종15)만 해도 혼천의가 지어졌다는 소식에 세자(훗날 문종)로 하여금 자세히 알아보라 명한 후, 매일 들러 정초·장영실 등과 상의하는 게 일과였을 정도였다. 세종의 머릿속에는 정초와 더불어 이루고 싶은 일들이 하나 가득이었다.

하지만 정초는 1434년(세종16) 간의대 조성 마무리 즈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격무와 과로를 마다하지 않고 임금의 과학적 동지로 지내온 일평생의 끝이었다. 세종은 “하늘이 너무도 급히 빼앗아 가버려 마음이 슬프다”며 한탄했다. 이제 어디서 그만한 인재를 얻어 뜻을 나눈다는 말인가. 이에 세종은 이틀간이나 조시(朝市, 아침시장)를 정지시키고 제사도 치러주었다. 세자도 부의를 통해 애도를 표했다. 정초가 일찍이 세자빈객(世子賓客, 세자시강원의 정2품 벼슬)을 지낸 인연이었다.

더불어 세종은 정초에게 ‘문경(文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문’은 배움에 부지런하고 묻기를 좋아한다는 의미였고, ‘경’은 의(義)에 따라 절제한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정초는 선발 과정이 까다롭다는 청백리에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일신의 안위보다는 나라를 위한 일에만 몰두한 위인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공동 기획: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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