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세상의 모든 엄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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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26   |  발행일 2017-10-26 제30면   |  수정 2017-10-26
얼마 전 어머니에게서
새 공약 하나를 받아냈다
나의 환갑상 차려주겠다고
손도장을 꾹 찍었다
그때까지 건강하길 바라며
[여성칼럼] 세상의 모든 엄마들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한 달 전에 돌아간 엄마 옷을 걸치고 시장에 간다/ 엄마의 팔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팔을 꿰고/ 엄마의 목이 들어갔던 구멍에 내 목을 꿰고/ 엄마의 다리가 들어갔던 구멍에 내 다리를 꿰고/ 나는/ 엄마가 된다/ 걸을 때마다 펄렁펄렁/ 엄마 냄새가 풍긴다/ -엄마… / -다 늙은 것이 엄마는 무슨…/ 걸친 엄마가 눈을 흘긴다” (이경림 시, ‘걸친, 엄마’ 전문)

며칠 전 지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문상 가서 본 그녀의 눈이 많이 부어있었다. 위로를 건네고 돌아와 일찍 누운 잠자리에서 이 시가 떠올랐다. 연세 든 어머니 걱정도 되고, 생각이 꼬리를 제대로 물었던지 시간은 새벽으로 건너가는데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 다음날 일정이 걱정돼 “양 한 마리 풍덩, 양 두 마리 풍덩…” 양도 잡고 쥐도 잡고 해봐도 소용이 없다.

한참을 뒤척이다 스마트폰을 주워들었다. 연락처를 열어 전화번호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화번호가 바뀌면서 이중으로 등록되어 있는 이도 있고, 저장만 해두고 1년 가야 한 번도 연락하지 않는 이도 있었다. 가장 난감한 순간은 이제는 세상에 부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삭제 버튼이 안 눌러지는 이름들이다. 한때는 피붙이였거나, 학문적·예술적 존경의 대상이었거나, 다정하게 교류했던 이들이다. 지금은 허망하게 사라지고 없는 존재들이지만, 조금만 애를 쓴다면 목소리가 생생하게 기억이 날 것 같다. 이들의 이름을 지우면 기억 속 존재마저 사라질까봐 기능을 상실한 전화번호를 다시 읽어보고, 이대로 통화버튼을 눌러 그들이 전화를 받는다면 얼마나 신기할까 말도 안 되는 상상도 해보고, 이제는 지워도 될까 갈등하다 그냥 다시 덮어두었다.

내친김에 문자메시지도 정리해본다. 광고성 스팸 문자, 신용카드 사용내역 알림문자, 철 지난 명절인사들을 정리하다 어머니가 보낸 오래된 문자 하나를 발견했다. “우리 딸 안녕, 한 번 한숨 쉬면 에미의 심장이 한 치씩 내려앉습니다. 아야!” 수년 전 보낸 문자인데 어찌나 귀엽던지(?) 휴대폰을 바꿀 때에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저장해두고 있는 문자다. 잊고 있었는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한숨만 쉬어대던 딸이 노모의 속을 어지간히 태웠나 보다.

이번엔 사진을 정리할 차례다. 사진 속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환하게 웃고 계신다. 외할머니는 칠년 전 백수(白壽)를 한 해 남겨두고 편안하고 조용하게 생을 거두셨다. 사람이 돌아갈 때가 되면, 먼저 가신 분이 그 사람을 데리러 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외할머니를 보내고 난 며칠 후, 어머니도 나도 허전함과 먹먹함에 잠을 이루지 못한 어느 날 밤인가 보다. 난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 꼭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 안심하고 편안한 맘으로 갈 수 있을 거 같다고. 어머니가 “그러마”라고 약속했다. 얼마간 정적이 흐른 후 어머니의 조용한 흐느낌이 들렸다. 나도 외할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언젠가는 닥칠 어머니와의 이별에 대한 서러움으로 미리 눈물이 났었다. 당시 일흔넷의 어머니에게도 엄마를 잃는 것, 또 그것을 견딘다는 것이 힘든 일이었던 것이다.

올해 여든하나, 팔순을 넘긴 어머니는 몸도 마음도 약해지시나 보다. 최근 들어 외할머니만큼 오래 살 자신이 없다고도 하시고, 기억력도 예전만 못하다고 속상해하신다. 그래서 얼마 전 어머니에게서 새로운 공약 하나를 받아냈다. 내 환갑상은 엄마가 차려달라고 떼를 쓴 거다. 엄마랑 서른 해 차이니 내 환갑 년엔 엄마 연세가 아흔하나. 그때까지 건강하게 계셔서 딸내미 환갑 생일상 차려주겠다고 손도장 ‘꾸욱’ 찍었다. 약속 잘 지키는 분이니까 가능하리라 기대한다.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일은 어미를 잃는 것. 엄마를 잃은 모든 생명과 세상 모든 엄마들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해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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