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가을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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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1   |  발행일 2017-11-01 제30면   |  수정 2017-11-01
참 맑고 시퍼런 심연의 가을
우리가 하늘을 보려 하지만
실제 보는 건 자기 자신
모두 자기를 싹틔우려 해도
현실에 감금될 수밖에 없다
[동대구로에서] 가을 사용법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또 가을이다. 매년 같은 패턴이지만 느낌은 매번 다르다. 가을은 사계절 중 반사각이 가장 정교하다. 완벽한 거울이다. 인간은 그 거울 앞에서 자기 트라우마 깊이만큼 ‘보복’당한다.

트라우마란 고질병. 결국 인류의 ‘호작질’로 증폭된다. 앞선 호작질은 뒤이은 호작질에 의해 더욱 배양된다. 호작질은 스스로를 합리화하고 교활해진다. 나중에 ‘이념’이란 탈을 쓰게 되면 학살과 테러까지 정당화해버린다. 호작질은 호작질을 지울 수 없다. 요즘 TV인문학은 그 호작질을 재밌게 포장해 잘 팔아먹고 있다. 숙주인 인간의 욕심과 욕망, 그게 공멸해야 호작질도 비로소 제자리로 갈 수 있을까.

하늘이란 놈이 넓이가 아니라 하나의 ‘날’로 다가서는 계절. 가을이다. 참 맑고 깊은 그의 눈초리. 저놈 앞에선 술도 담배도 돈도 권세도 심지어 예술까지도 무력해진다. 저렇게 대책 없이 시퍼런 수직이 또 있을까. 더없이 투명한 하늘, 자기 심연을 모르는 자에겐 섬뜩한 ‘흉기’나 다름없다.

가을이면 달달한 노래가 너무 난무한다. 우수와 고독? 왠지 상투적이고 통속적이고 그래서 궁합이 안 맞다. ‘가을편지’와 ‘고엽’ 등이 빈발하지만 그건 너무 멜로딕해서 싫다. 가을과 감미로움. 별로 매칭이 안 된다.

이 가을, 약처럼 복용해도 좋을 음악 두 곡을추천해본다. 한영애가 부른 ‘가을시선’, 그리고 100세 같은 84세의 노구, 세상에서 가장 무심한 음성을 안개처럼 뿜어내는 미국 컨트리뮤직의 대명사 중 한 명인 윌리 넬슨의 명곡 ‘Always on my mind’.

‘이제는 모두 돌아가 제자리에 앉는다. (중략) 모든 것 이해하며 감싸 안아주는 투명한 가을날 오후’.

한영애의 보이스톤. 심우주로 등속도운동하는 우주선의 궤적 같다. 이 계절 그녀의 목소리는 일품이다. 낭독하듯 노래하는 무심·담담한 김민기의 중후하고 둔중한 음색,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의 눈매 같은 조동진의 비장한 우수의 냄새도 가을과 잘 포개지긴 한다. 장사익은 너무 한스럽다. 다들 1% 모자란다. 윌리 넬슨의 목소리를 등장시켜본다. 갑자기 예의 세 가수 목소리가 빈약해지는 것 같다. 블루스 뮤지션 에릭 클랩튼의 어질고 자애로운 음색보다 한 수 위의 평정심이 엿보인다.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독법이다.

담금질이 완벽하게 끝난 장인의 칼날. 가을은 그 위에 인간의 맘을 올려놓는다. 날에서 깊이를 건질 건가 아니면 넓이를 건질 건가. 날을 응시하면 깊이와 넓이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가을이란 날은 그 어떤 깊이보다 깊고 그 어떤 넓이보다 더 넓다. 우리가 하늘을 보려고 하지만 실제 보는 건 하늘이 아니라 자기다. 나는 나 이상 나 이하를 볼 수 없다. 이 가을, 나를 움직이게 하는 그 나, 정말 나는 어디 있지.

불교 유식학(唯識學)의 한 지평을 보여주는 ‘능엄경’의 서두를 보면 부처와 제자 아난다가 맘의 소재를 놓고 벌이는 대화가 나온다. ‘맘은 안에도 밖에도 없다’는 게 주 내용인데 아직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청정한 하늘을 배경으로 낙엽이 ‘피고’ 있다. 왜 지지 않고 피는 걸까. 낙엽도 꽃이니까. 이승과 저승에 걸린 또 다른 부활의 시그널이기 때문이다. 저마다 가을 앞에서 자기를 싹 틔워보려고 바둥거린다. 너머를 동경하지만 우리 삶이란 늘 자기란 현실한테 감금될 수밖에. 누군 한 경지를 운운한다. 그 경지라는 게 곧 내 한계(限界)겠지. 가을 왈, 한계도 너머도 논하지 말라! 되레 장터 아줌마, 아니 새벽 조업 중인 어부의 손, 그 앞에서는 오히려 가을이 머릴 숙일 것 같다. 먹고산다는 것의 숭고함 때문일까.

아무튼 탄핵정국 1주년 즈음. 태극기와 촛불이 저마다 사이좋게 펄럭거린다. 동질 계열의 두 욕망이 같은 톤으로 일렁거리고 있다. 가을이다. 그리고 갑자기 궁금하다. 북핵도 가을을 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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