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법의 논리로 미술이 판단돼서는 안된다

  • 조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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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09   |  발행일 2017-11-09 제31면   |  수정 2017-11-09
[영남타워] 법의 논리로 미술이 판단돼서는 안된다

박정현이라는 미술 작가가 있다. 경북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하고, 영국 런던 킹스턴대학에서 공간 디자인과 대학원을 졸업한 실력있는 작가였다. ‘작가였다’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한 것은 요즘 거의 작업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현은 미술이 아닌 영어를 가르치며 생활하고 있다.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박정현은 지금 ‘표절 소송’에 휘말려 있다. 3년이 넘도록 지루한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 박정현 입장에서는 하루하루가 피가 마르는 심정일 것이다. 작업은 엄두도 못 내는 형편이다. 미술이 ‘두려워’ 영어로 먹고살고 있다.

박정현은 2014년 유망한 신진 작가를 발굴, 지원하는 대구미술관의 ‘Y아티스트 프로젝트’에 선정돼 개인전을 가졌다. 당시 박정현이 고무줄로 설치한 ‘방해’라는 작품에 대해 부산 출신의 손몽주 작가가 표절 의혹을 제기했고, 법적 분쟁으로 비화됐다. 부산지방법원은 1심에서 박정현에게 9개의 형식을 띤 작품을 제작, 전시, 공표하지 말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법원이 미술 작가에게 미술 지도를 한 꼴이다.

오은실 한국저작권위원회 강사는 박사 논문인 ‘현대미술 표절 분쟁에 관한 연구’를 통해 부산지방법원의 판결에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고 주장했다. 오 박사는 “부산지방법원이 박정현에게 고무줄을 촘촘히 메우지 말라고 했는데 느슨히 메우는 것은 가능한 것인지, 한쪽 벽만을 고무줄로 메우지 말라고 했는데 모든 벽면을 고무줄로 메우는 것은 가능한 것인지, 촘촘히 메우지 말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허용되는 고무줄 간격은 어느 정도인가”라며 법원의 판결에 의문을 제기했다. 박정현도 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항소했고, 현재 2심이 진행중이다.

박정현의 ‘표절 소송’은 출발부터 아쉽다. 창작물에 대한 표절 여부를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는 게 맞는지가 당장 의문이다. 표절 연구 전문가로 알려진 남형두 연세대 교수는 “고도의 예술과 학문의 영역에서 그 본질에 해당하는 논의에 사법적 잣대를 갖다 댈 수 있을 정도로 법관들이 준비돼 있는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법이라는 텍스트를 유연하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않으면 미술에서 작업 방식을 검찰이 일일이 지도하는 세상이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작가에게 표절 딱지는 무섭다. 평생을 따라다니는 주홍글씨나 다름없다. 창작 의지를 꺾는 것은 물론 인격적인 말살이 되기도 한다. 억울한 표절 딱지가 붙으면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닐 수 있다. 지금 박정현이 딱 그런 상황이다. ‘의도적으로 이뤄진 표절은 비난받지만, 표절이 아님에도 일단 제기하고 보자는 풍토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표절 의혹이 제기되면 나중에 표절이 아니라고 판명이 나더라도 표절이라는 인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지적에 공감할 수밖에 없다.

부산 미술계 일각에선 최근 ‘희한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박정현의 표절 분쟁이 제기됐을 당시 대구미술관장이었던 김선희 현 부산시립미술관장에게 표절 전시 논란에 대해 공개사과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술계 내부의 논의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사법적 판단조차 끝나지 않았는데 무엇을 사과하라는 것인지 이해가 안된다. 김 관장도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비교 대상이 됐던 두 작품의 특성이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 빚어진 오해라고 본다. 사과할 사안이 아니다”고 밝혔다.

대구 미술계의 태도도 아쉽기 짝이 없다. ‘박정현 사건’을 애써 모른 척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대구 미술계의 한 인사는 “자칫 지역 간 싸움이 될까봐 걱정하는 것 같다.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해가 안된다. 표절은 개인적으로나 미술계 전체적으로나 굉장히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다. 표절 문제를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미술계 내부에서 활발하게 논의가 이뤄지고, 대학에서도 다뤄져야 한다. 표절 논란은 박정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가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박정현의 작업도 다시 보고 싶다. 조진범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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