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기다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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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0 07:47  |  수정 2017-11-10 07:47  |  발행일 2017-11-10 제16면
[문화산책] 기다림의 미학
고현석<영화감독>

“나는 위대한 영화를 만들려는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나는 원작이 가진 주제와 상황을 보고 영화를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뿐이죠. (중략) 나는 영화를 빨리 찍기 위해 텔레비전의 스태프와 일했습니다. 촬영속도가 떨어지는 욕실 살해 장면, 바닥 청소 장면, 그리고 몇 개의 장면을 빼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만드는 속도로 촬영했습니다.”

‘히치콕과의 대화’를 보면 히치콕은 철저한 사전 설계를 바탕으로 무서운 속도로 정확하게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이었다. 반면 히치콕과 정반대의 태도로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들이 있다. 그들은 영화는 예술로서 철학이나 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믿었다.

1975년 작 ‘거울’은 아버지를 기다리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담은 감독의 자전적 영화다. 이 영화에는 현재 CG기술이 아니면 촬영하기 힘든 기적 같은 장면이 나온다. 화면 저편에서 파도처럼 바람이 숲을 흔들며 서서히 카메라를 향해 다가오는데 카메라는 그 바람의 흐름과 더불어 절묘하게 움직인다. 자연의 바람을 카메라로 포착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한다. 한참 동안 공간을 관찰하고 바람을 계산한 다음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수많은 컷을 찍어내고 그중에서 하나를 건져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를 찍은 감독이 배우를 캐스팅하는 방법을 보면 그가 어떤 태도로 영화를 찍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캐스팅을 할 때 오디션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먼저 배우의 사진을 찾은 다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생각한 얼굴과 목소리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고 한다. 일치하면 그 배우를 전폭적으로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한 이미지가 얼굴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고 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그렇게 세계영화사의 위대한 영상시인이 될 수 있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에 비견되는 대구 출신의 배용균 감독도 기다림의 대가였다.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의 스태프로 참여했던 선배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 한 컷을 촬영하는 때도 많았고 촬영 세팅만 하고 촬영하지 않은 날도 많았다고 한다. 촬영만 3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놀라운 것은 전작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경우 6년이 걸렸다고 한다. 감독이 영화를 제작하는 방식은 그 자체로 구도자의 고행에 가깝다.

수많은 거장들이 기다림의 미학을 미덕으로 삼아 작업을 한다. 그 계보는 오늘날 벨라 타르나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으로 이어져 히치콕의 세례를 받은 여느 영화와 다른 영화를 펼쳐 보인다. 각고의 기다림 끝에 성취하는 마법 같은 시간. 그래서 그런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나뉘게 된다. 믿을 수 없이 지루하거나 믿을 수 없이 기적적이거나. 고현석<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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