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자 스토리가 있는 청도로… .6] 한국 시조문학의 대가, 이호우·이영도 남매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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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4   |  발행일 2017-11-14 제13면   |  수정 2017-11-14
생가 지키는 감나무 두 그루…홍시 따던 어린 오누이 떠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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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에는 청도 출신의 시조시인 이호우·이영도 남매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다. 매년 이호우와 이영도를 그리는 많은 사람이 생가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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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우·이영도 남매의 생가가 자리한 내호리에는 ‘오누이 시비 공원’이 조성돼 있다. 공원에는 남매의 시비가 각각 하나씩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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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우·이영도 남매의 생가 주변 거리에는 정미소 등 옛 모습이 꽤 남아있다.

청도는 이호우(李鎬雨, 1912∼70), 이영도(李永道, 1916∼76) 오누이 시조시인의 고향이다. 한국 시조문단에서 이들의 비중이 큼에 따라, 청도가 유장한 우리 민족시의 본류요 정수라 여기는 시조의 정서를 가장 잘 받아들이는 고장으로 꼽히기도 한다. 청도군은 이를 큰 자랑으로 여긴다. 그래서 이들의 문학을 현창하는 사업을 다채롭게 벌여나가고 있다.


어릴적부터 오빠 이호우 잘따랐던 영도
영남시조문학회 창립에도 나란히 참여
두 권으로 엮은 오누이 시조집까지 발간

내호리 생가엔 해마다 많은 사람들 발길
마을앞 언덕 ‘오누이 시비 공원’도 조성
郡, 오누이시조문학제 열어 민족시 계승



#1.시조시단에서 희귀한 오누이 시조시인 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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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우(왼쪽)는 우리 시조시의 현대성을 누구보다도 빨리 자각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는 시조가 갖는 낡음과 고답성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현실과 자연의 융화를 모색했다. 이영도는 시조 속에서 현실감각을 드러내면서 여성적인 우아함과 단아함을 잘 표출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호우·이영도 오누이 시조시인은 영남시조문학회 창립에도 함께 참여하는 등 문우이자 남매로 끈끈한 정을 나누었다. <이호우·이영도 문학기념회 제공>

가을이 짙어지면서 청도의 하늘엔 빨간 등들이 온통 수놓였다. 잎이 떨어지고 오롯이 드러난 붉은 감들이 온 마을과 들을 물들이고 있는 것. 이호우·이영도 남매의 생가에도 대문 위로 솟은 제법 나이든 감나무 두 그루에 붉은 감들이 주렁주렁하다. 장대로 홍시를 따먹는다. 달다. 고향집 마당의 가을 정서가 느껴지고, 그런 풍경 속으로 어린 오누이가 감을 따는 들뜨고도 다감한 그림이 떠오른다.

이영도는 오빠 이호우를 어릴 적부터 잘 따랐다. 이영도는 이호우보다 네 살 아래다. 이호우는 연약했다. 1924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했으나, 1928년 신경쇠약 증세로 낙향했다. 그 이듬해에는 일본 도쿄 예술대학에 유학했으나 역시 신경쇠약의 재발과 위장병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이런 오빠를 바라보는 이영도의 마음은 연민과 동경으로 뒤범벅이 된 상태였으리라. 이영도 역시 젊은 날에는 앓아누운 날이 많을 정도로 병약했다. 이호우가 1934년 결혼을 한 다음 시조를 쓰기 시작하자, 이영도의 문학 서적 탐독도 열을 더해 갔다.

이호우가 1940년에 ‘달밤’이란 시조로 문장지 추천 시인이 된 지 얼마 안 되어(1946년) 이영도는 시조 ‘제야’를 죽순 지에 발표하면서 시인이 된다. 남편을 사별한 직후였다. 그 아픔을 통해서 삶을 새롭게 자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문학에 관심이 간 것이다. 이 역시 오빠의 영향이 컸기에 가능했다.

문단에서 희귀한 경우로 꼽히는 이호우·이영도 오누이 시조시인은 이후 영남시조문학회 창립에도 함께 참여하는 등 문우이면서 남매로서의 끈끈한 정을 나누어 나간다. 이들 남매를 두고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호우는 초기 서정적 정한의 시세계에서 객관적 관조의 세계로 변모를 보이면서 우리 시조시의 현대성을 누구보다도 빨리 자각했다. 시조가 갖는 낡음과 고답성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현실과 자연의 융화를 모색, 한국 시조문학의 한 특이한 개성으로 우뚝 선 것이다.

이영도는 그런 오빠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강단 있는 현실 감각을 드러내면서 여성적인 우아함과 단아함을 잘 표출해냈다. 쪽 찐 머리에 한복을 즐겨 입는 모습으로, 정갈하면서도 우리의 정한을 속으로 삭이는 시조를 가꾸어냈다. “이영도는 정한(情恨)의 시인이다. 오라버니 이호우가 절벽처럼 버티어선 거부(拒否)의 시인이었다면, 그는 어스름에 타는 목련처럼 한향(寒香) 속에 젖어 있는 시인이었다”는 정완영의 평이 인상적이다.

#2.만년에 오누이 시조집 발간하기도

1968년 이호우·이영도 남매는 두 권으로 된 오누이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를 발간한 것도 인상적이다. 이호우편은 ‘휴화산’, 이영도편은 ‘석류’였다. 오누이 시인으로 문단에 이름이 알려진 것을 기꺼이 수용, 이 시조선집을 발간함으로써 하나의 기념비적인 의미를 붙인 셈이다.

몹시 추운 밤이었다
나는 커피만 거듭 하고

너는 말없이 자꾸
성냥개비를 꺾기만 했다

그것이 서로의 인생의
갈림길이었구나

 -이호우의 ‘회상’ 전문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 슬었나

보리누름 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긴고

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 보네

 -이영도의 ‘보리 고개’ 전문


이호우의 시가 현실적인 면이 강하다면, 이영도의 시는 삶의 근저에 닿아있는 아픔과 잘 이어져 있음이 이 두 시의 비교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빠 이영도는 이 시집이 나온 2년 후인 1970년 급서한다. 오빠 없는 삶은 또 다른 그리움으로 이영도를 내몰지만, 왕성한 시창작과 문단 활동으로 자신의 길을 열어나간다. 그러나 이영도 역시 오빠가 죽은 지 6년 만에 뇌일혈로 사망한다.

#3.고향마을에 오누이 시비공원 조성

청도읍 내호리에는 그들의 생가가 있다. 생가 주변의 거리에는 정미소 등 옛 모습이 꽤 남아있다. 1946년 대구로 이사하면서 6촌 동생에게 팔고 갔던 집은 현재 아무도 거주하지 않지만, 매년 이호우와 이영도를 그리는 많은 사람이 찾아든다. 이곳 생가는 2006년 12월4일 등록문화재 제249호로 지정되어 청도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 마을 앞, 이들 남매가 ‘변함없이 그리워한 비파강 물소리 곁’(민병도) 언덕에는 ‘오누이 시비 공원’도 조성되어 있다. 2005년 1월29일 제막식을 가진 이 공원에는 ‘이호우 시비’와 ‘이영도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시비에는 이호우의 ‘살구꽃 핀 마을’과 이영도의 ‘달무리’가 각각 새겨져 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이호우의 ‘살구꽃 핀 마을’ 전문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우주이던 가슴

그 자락
학같이 여시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랑이

 -이영도의 ‘달무리’ 전문


이들 남매 사후 1991년에는 이호우시조문학상 운영위원회가 발족되는데, 2001년 청도군에 이관돼, 군 조례가 제정됐다. 2002년에는 정운(이영도의 호)시조문학상까지 이관 받아 청도군 주최로 이영도시조문학상을 시상하기로 하고 청도군조례를 개정했다. 이 상들은 2009년 이호우·이영도 오누이시조문학제로 통합되어 문학제와 더불어 시상되고 있다. 지난 가을 청도문화체육센터 및 오누이 시조공원 등지에서 열린 오누이시조문학제에는 전국의 시조시인들이 대거 몰려 이호우·이영도 남매시인의 시 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민족시 정신의 맥을 잇기 위한 행사로 성황을 이루었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 기획 : 청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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