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 칼럼] 열 번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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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4   |  발행일 2017-11-14 제31면   |  수정 2017-11-14
[CEO 칼럼] 열 번째 사람
박봉규 (서울테크노파크 원장)

조선시대 정부 조직의 원리는 강력한 중앙집권과 함께 중앙기관 상호 간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데 있었다. 왕과 신하 간은 물론이요, 정승판서로 대변되는 정책집행기관과 사헌부·사간원을 중심으로 하는 감독기관이 비판적인 시각으로 서로를 바라보도록 조직돼 있었다. 부정부패는 물론이요, 사회지도층으로서의 신분에 걸맞지 않은 행동이 있으면 추상같은 추궁이 이어지게 마련이어서 이를 바탕으로 문예부흥과 민생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제도적 장치는 조선 중기 비변사라는 기관이 생겨나면서부터 상황이 바뀌게 된다. 비변사는 본래 남쪽의 왜구와 북방 야인들의 침략에 대비해 국방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기관이었으나 점차 권한을 강화해 조선 후기에는 국정 전반을 논의하는 합의제 기관이 되었다. 그래도 초기에는 비변사 구성원에 당파별로 자리를 안분해 서로 견제했으나 세도 정치기가 되면서 몇몇 세도가문에서 당상의 자리를 모두 차지하니 조선 초기에 볼 수 있었던 상호 비판이나 견제는 있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족벌들은 비변사를 통해 자기들에게 도전하는 세력을 탄압하고 부정부패를 저지르며 매관매직을 통해 지방관의 횡포를 부추겼다. 정치 기강은 무너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면서 조선 사회는 급속히 무너져갔다.

비변사의 실패는 같은 생각과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앉아 나랏일을 논의하다보니 제대로 된 비판이나 반대가 자리 잡을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합의제의 특성상 몇몇 원로가 사전에 의견을 조율해 제시하면 아랫사람들은 설사 다른 생각이 있어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어떤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 집단이 편견과 오만에 빠져 반대자는 모두 부도덕한 존재로 규정하고 자연스레 만장일치가 되도록 압력을 가하는 집단사고는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이 모두 비슷한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반대자의 눈으로 보아야만 보일 수 있는 위험요소가 아예 검토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SNS상에서 자기가 좋아하거나 의견이 일치하는 내용에 ‘좋아요’를 누르다보면 끼리끼리의 문화가 더 강화되는 것과 같다.

공론이나 여론이라는 이름 아래 반대자를 억압하거나 갈등이 두려워 미리 입을 막는 사회나 조직은 위험하다. 반대가 없는 세상, 갈등이 없는 조직이 결코 최상이 아니다. 살아 움직이는 조직에는 늘 문제와 갈등이 있기 마련이요, 이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 발전의 과정이다. 물론 반대자를 곁에 두고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에 성군이라 평가받는 임금일수록 간언하는 신하를 늘 가까이에 두었고 반대의견이 없으면 안건의 통과 자체를 미루기도 했다. 혼군이나 독재자일수록 그 주변에는 일사불란한 목소리가 넘쳐나게 된다.

지역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역사적 전통을 같이하는 폐쇄사회일수록, 같은 생각을 공유할수록, 지켜야 하는 기득권이 클수록 반대의 목소리는 잦아들 수밖에 없다. 그 결과는 자연계에서 동종교배가 계속될수록 열성인자가 늘어나듯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역의 경쟁력은 떨어지게 된다.

조직과 사회 안에서 반대의견이 자연스럽게 개진될 수 있는 제도와 풍토를 만들고 그 목소리에 가치를 부여하자. 의사결정을 함에 있어서 설사 만장일치의 합의가 있을지라도 토의에 참여한 마지막 한 사람은 반드시 반대의견을 내야 하는 ‘열 번째 사람’이라는 유대인의 관습을 벤치마킹해보자. 우선 각종 위원회를 구성함에 있어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한 명이라도 참여시켜 보자. 반대가 없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박봉규 (서울테크노파크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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