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만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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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6   |  발행일 2017-11-16 제30면   |  수정 2017-11-16
추수 끝난 들판 볏짚더미
도로변 만산을 채운 홍엽
비워내서 가득차 있음과
신산한 세월 견딘 붉음서
빈손의 인생을 생각한다
[여성칼럼] 만추
허창옥 (수필가)

창 밖 세상은 고요하다. 키 큰 나무들이 긴 팔을 흔들고 잎사귀들은 까무러치도록 나부낀다. 그런데도 소리가 없다. 자동차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갈 길이 바쁘다.

세상사가 그렇다. 밖에서는 안에서 나는 온갖 소리들을 알아듣지 못하고, 안에서는 바깥의 소란스러움을 모른다. 서로 알아듣지 못함이 서운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알아듣지 못함이 그나마 힘든 세상살이를 견디게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한 사회적 부채감이 없지는 않지만, 나의 오만 가지 고뇌에 너의 무거움을 다 보태면 버거워서 무너질지도 모른다. 국도를 달리면서 그런 상념에 젖어 있는데 빈 들판이 눈에 꽉 찬다.

추수가 끝난 들판은 비어서 참으로 배부르다. 볏짚까지 거둬들인 논바닥은 모직 양복지처럼 줄무늬도 선명하게 누워 있다. 대지는 어머니다. 대지는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무생물들까지를 능히 품을 만큼 그 품이 넓고 넉넉하다. 늦가을 들판은 봄부터 내내 자식을 끌어안고 키우다가 가을이 되면 다 내어주고 텅 비어있는 늙으신 어머니 같다.

군데군데 볏짚은 원통형으로 뭉쳐져서 서 있거나 누워 있다. 볏짚을 뭉쳐서 발효제를 넣고 비닐로 감아놓으면 소의 먹이가 된다고 한다. 편리해진 세상이다. 타작이 끝난 볏짚은 겨우내 땔감으로 쓰거나 새끼를 꼬기도 하고 가마니를 짜기도 했다. 이엉을 엮어서 거무죽죽하게 삭아버린 초가지붕을 걷어내고 새옷을 입히기도 했다.

비닐을 입힌 볏짚뭉치를 보면서 오래전에 이 땅의 어머니들이 비녀를 빼고 처음으로 파머머리를 했을 때의 그 낯설음이 잠시 지나갔다. 세상은 급변한다. 농사가 기계화되는 건 당연하다. 일손은 늘 모자라고 농부들은 점점 늙어간다. 마냥 그대로이면 정말 안 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모든 게 번개보다 빠른 디지털시대에도 아날로그는 늘 그립다. 저물녘이면 소죽 냄새 가득 번지던 유년의 그 집이 그립다.

건천에서 4번 국도를 벗어나 7번 국도로 들어선다. 만산홍엽이다. ‘만산홍엽’을 처음 쓴 이는 누구일까. 늦은 가을, 꽉 찬 가을의 산을 네 글자로 온전히 압축시킨 그는 대체 누구일까. 글을 쓴 세월이 짧지 않건만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지 못했다. 하여 이 표현을 빌려 쓸 때면 미안한 마음이 된다. 한자어를 되도록 쓰지 않아야 하는 무슨 불문율 같은 게 있어서 자주 쓰지는 않지만 봄의 그 ‘만화방창’처럼 이것도 도무지 대체할 만한 표현을 알아내지 못하겠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겹겹의 산을 바라보니 경이롭다. 그 아름다움에 외경을 느낀다. 과연 자연이 베풀어준 성찬이라 하겠다. 비바람에 젖고 흔들리면서 성장하고, 내리쬐는 햇볕 속에서 한껏 푸르렀다가 가을이면 곱게 물드는 대자연의 신비, 그 깊이를 가늠할 길이 없다. 마침내는 다 떨구어내어서 대지로 고스란히 돌려준다. 대지로 돌아가는 그 마지막 길목에서 나무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진대 우리는 과연 그런 모습이 될 수 있을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다 놓아버리고 겸허히 빈손으로 가야지를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터다. 하지만 욕심을 부여잡고 놓지 못하는 한 결코 늦가을 들판의 그 비워내서 가득 차 있음과 배부름을 알지 못한다. 신산한 세월을 견뎌내고 황량한 사막 같은 삶을 버텨낸 후에야 만추의 산처럼 속속들이 고운 빛깔로 물들 수 있음을 알 것도 같다. 오, 그러나 그런 사람이 되는 길은 멀고도 멀지니 하릴없다.

포항으로 가는 길, 국도를 달렸다. 조수석에 앉아서 빈 들판을 바라보고 가을 산을 만끽했다. 나무들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지만 소리가 없고 내다보이는 풍경은 평화롭다. 시내로 들어선다. 사람과 건물, 자동차들이 많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다. 쉽지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기꺼이 그 소리 나는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허창옥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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