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산 동학산 경흥사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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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7   |  발행일 2017-11-17 제36면   |  수정 2017-11-17
한 단 남은 수미단…황룡·기린이 살아 나올 듯 꿈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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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스름한 석축이 조금씩 높아지다 층층 돌계단을 연다. 계단을 오르면 은행나무 사이로 멀리 대웅전 어칸에 좌정한 주존불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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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사 목조 석가여래삼존좌상. 1644년에 은행나무로 조성한 것으로 보물 1750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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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부전의 수미단. 단 한 단만이 남아 있지만 고색을 간직한 섬세한 조각을 볼 수 있다.

활주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경산에서 청도로 가는 25번 국도. 아담하고 정겨웠던 옛 길은 아직도 선명한데, 곧고 너른 길은 하늘로 이어져 있을 것 같아 열띤 흥분이 솟는다. 난다, 난다, 대뇌를 울리는 외침이 사그라지기도 전에 착지를 준비케 하는 큼직한 이정표, 경흥사(慶興寺). 보물이 있다는 절집이다. 경흥사는 학이 울며 날아와 앉았다는 동학산(動鶴山) 자락에 꽁꽁 숨어 있다. 울며 날아온 학의 마음을 이해한다.

학이 울며 날아와 앉았다는 동학산 자락
659년 혜공스님이 그 부리에 지은 경흥사

계류 따라 한참…석축 높아지다 돌계단
두 은행나무 일주문 삼아 멀리 대웅전
中 은행나무로 만든 보물 1750호 삼존불
광활한 절터 ‘임란 첫 승군 훈련 본거지’


◆ 학의 부리에 앉은 절집

동학산은 경산 남천면과 달성 가창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해발 600m가 조금 넘는 높이다. ‘대구읍지’에는 “대구부에서 동으로 20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산세가 치솟아 올라 험준하고 층층단애로 가파르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학산의 남쪽 사면에는 경산공원이 들어서 있는데 그곳은 확실히 층층단애다.

산전(山田)마을 지나 계류를 따라 산 속으로 한참을 들어간다. 산전리는 동학산의 북동 끝자락에 자리한 마을로 큰 산 아래에 있다는 뜻이다. 계류 가에 식당 몇 개가 있는 사하촌을 지나면 사방 산으로 둘러싸인다. 길 아래 깊은 계곡을 내려다보며 산세를 가늠해 본다. 그러나 넉넉한 산길은 안온하고 가을산은 곱고 깨끗해 험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다. 파르스름한 화강석 축대가 나타나면 곧 절집이다. 축대는 조금씩 높아지다 층층 돌계단을 연다. 초록빛 이끼에 감싸인 돌계단에는 물들지 못하고 떨어진 초록 이파리들이 가득하다.

649년 혜공(慧空) 스님은 한눈에 이 산이 명당임을 알아보았다 한다. 스님은 울며 날아와 앉은 학의 부리에 659년 경흥사를 지었다. 그리고는 학이 날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앞산을 병풍산이라 했다. 입을 막고 병풍을 치다니, 다소 거친 방법이 아닌가. 돌계단을 오르면 두 그루 은행나무가 일주문처럼 서 있고 그 사이로 멀리 어둠에 싸인 대웅전 어칸이 보인다. 오른쪽에는 요사로 보이는 건물이 있고 왼쪽에는 종각이 있다. 울음 대신 종소리다.

◆ 삼존불과 수미단

경흥사에 대한 고려시대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중건이 있었다고만 알려져 있다. 현재의 대웅전은 1990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내부에는 보물 1750호인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이 모셔져 있다. 삼존불은 1644년에 은행나무로 조성한 것이라 한다. 당시 영규 스님이라는 분이 전국을 돌며 탁발한 돈으로 중국 헤이룽강에서 은행나무를 구해 삼존불을 모셨다는 기록이 주존불의 복장에서 나왔다. 사찰의 창건 시기도 복장 기록을 통해 밝혀진 것이다.

대웅전 앞쪽에 강학당과 명부전이 나란히 있는데, 명부전은 조선 후기의 것으로 경흥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원래 명부전이 대웅전이었고 삼존불을 모시고 있었다고 한다. 명부전에는 대웅전이었던 당시의 수미단이 남아 있다. 단 한 단만이 남아 있고 칸을 나누는 동자기둥도 사라졌지만, 고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섬세한 조각을 볼 수 있다.

풀꽃 사이에 앉은 검은 게, 불꽃을 휘날리며 날아가는 황룡, 여의주를 향해 내닫는 기린, 바람에 흩날리는 수염과 갈기, 내닫는 발 아래에서 튀어 오르는 불꽃, 활짝 핀 연꽃과 풀숲에 몸을 숨긴 물고기 등이 정교하고도 대단한 생동감으로 표현되어 있다. 영규 스님이 목조삼존불을 모실 때 지금의 명부전인 대웅전을 짓고 수미단을 제작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 수난 후의 평화

조선시대의 기록으로는 임진왜란이 있다. 최초의 의승군(義僧軍) 수백 명이 경흥사에서 훈련을 받고 전쟁터로 나갔으며 사명당 유정이 머물렀다고도 한다.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적기에 따르면 4~5개의 부속 암자가 있었으며 현재의 가람 동쪽에 수십 명의 학승이 상주하던 큰 건물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휘둘러보면 지금도 경역은 너른 편이다. 그러나 결국 왜군에 의해 불태워졌고 이후 중건되었지만 옛날의 규모만큼 회복하지는 못했다. 지금도 동학산 언저리 곳곳에 초석과 석축 등이 잔존하고 있어 광활했던 옛 절터를 증명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승군의 본거지였다는 사실은 일제 강점기의 수난으로 이어졌다. 수미단도 그때 훼손된 것으로 추측된다. 명부전 뒷벽에는 일제의 국가 문장이 그려 있었다. 일종의 광배처럼. 지금은 불화가 그려져 있다. 6·25전쟁 이후에는 극심한 도굴을 당했다. 점차 피폐해져가던 경흥사는 대웅전 신축 이후 꾸준히 불사를 일으켰다. 지금은 모두 마무리돼 너른 듯하면서 옹기종기하고, 작은 듯하면서 오뚝하다.

경흥사에서 가장 좋은 곳은 대웅전 뒤편의 산 중턱이다. 석등 하나가 오롯이 선 오솔길을 오르면 자미전, 독성각, 산령각이 나란히 앉아 있다. 아래에는 절집의 정연한 지붕선이 평정하고, 지구라트 모양의 둔덕 위에는 오래된 몇 기의 부도가 햇살 속에 따스하다. 깨끗한 마당 한가운데에 선 거대한 은행나무는 우주목처럼 찬연한데 단풍이 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깊다. 그렇게 빛이 머무는 시간이 짧다. 산과 산으로 둘러싸인 세계, 시선은 지상의 풍경을 넘어 뻗어나간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에서 달구벌대로를 타고 경산 쪽으로 간다. 경산네거리에서 우회전해 25번 국도를 타고 계속 직진, 대명1교에서 경흥사 이정표를 따라 나간다. 천변 길로 마을을 우회해 가다 식당촌 지나 만수사·경흥사 갈림길에서 경흥사로 가면 된다. 주차장은 넉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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