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웅의 나무로 읽는 삼국유사] 선덕여왕과 모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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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7   |  발행일 2017-11-17 제39면   |  수정 2017-11-17
“나비가 없으니 모란꽃에 향기가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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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의 여성군왕인 선덕여왕릉은 소나무가 능을 호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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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은 모란이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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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릉 앞 소나무의 솟대가 능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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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이 선견지명으로 백제군사를 제압한 여근곡.

선덕여왕(善德女王·632~647)은 재위 16년간 분황사, 첨성대, 황룡사9층목탑 등을 세우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러한 선덕여왕을 만나기 위해서는 경주의 낭산(狼山)을 찾아가야 한다. 높이 100여m로 나지막한 낭산의 정상에 선덕여왕의 안식처가 있기 때문이다. 낭산의 유래는 이리가 엎드린 모양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더욱이 낭산은 예로부터 신라의 신들이 노닐던 신유림(神遊林)으로 유명하다.

‘삼국사기’에는 실성왕 12년(413) 8월 구름이 낭산에 일어났는데 그 모습이 누각같이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져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실성왕은 낭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여겨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못하게 했다. 이런 신성한 곳에 신라 최초로 여성이 군왕에 등극한 선덕여왕릉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 최초 여성 임금의 영민함 대변
삼국유사 ‘지기삼사’ 설화의 하나로
당 태종이 선물 준 모란 그림과 관련
개구리 울음에 여근곡서 백제군 섬멸
낭산이 자기 안식처라는 예견도 유명


선덕여왕은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진평왕의 첫째 딸인 덕만 공주가 왕이 될 수 있었던 원인은 당시 신라의 골품제 신분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진평왕은 슬하에 아들이 없었고 딸인 덕만, 천명을 두었다. 골품제도에 의하면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우여곡절 끝에 첫째 딸인 덕만 공주가 선덕여왕으로 등극했다. ‘삼국유사’의 ‘선덕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에는 선덕여왕이 3가지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첫째는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선물로 보내왔을 때 향기가 없다는 사실을 예견했다고 한다. 신하들에게 명하여 모란 씨앗을 뜰에 심어서 꽃이 필 때를 기다렸는데 과연 향기가 없었다. 왜냐하면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모란을 그린 화폭에 나비가 없었기 때문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고 예견한 것이다.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다는 것은 선덕여왕을 희롱하기 위한 외교적 술수로 볼 수 있다. 당 태종의 의도를 꿰뚫어본 선덕여왕은 사물을 관찰하는 예지력과 선견지명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선덕여왕은 모란에 나비가 없는 그림을 보고 향기가 없다는 점을 알았던 것이다.

둘째는 한겨울에 영묘사 옥문지의 개구리 울음을 듣고 여근곡에 숨은 백제 군사를 물리쳤다고 한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은 선덕여왕은 신하들에게 병사 2천명을 거느리고 여근곡에 숨어 있는 백제군사를 격퇴하라고 명했다. 선덕여왕의 예지력 덕에 여근곡에 숨은 백제군사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선덕여왕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어떻게 여근곡에 백제군사가 숨어있다는 사실을 알았을까? 개구리의 눈이 불거진 모양은 성난 형상으로 군사를 상징한다. 옥문이란 여근을 말하는데 여자는 음이고 그 색깔은 흰색이다. 오방의 관점에서 보면 흰색은 서쪽 방향이다. 그래서 서쪽의 여근곡에 백제군사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 이런 선덕여왕의 해명에는 고도의 전략이 숨어있다. 선덕여왕은 국가통치의 탁월한 능력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여근곡 이야기에는 선덕여왕의 등극에 대한 귀족과 백성들의 불안을 잠재우려는 정치적 의도가 반영돼 있다.

여근곡은 경주 건천의 해발 630m 오봉산 자락에 있다. 오봉산 자락의 모양새가 여성의 음부를 닮아서 여근곡이라 부른다. 단풍이 곱게 물드는 가을날 여근곡 속으로 산책하는 기분은 참으로 묘하다. 여근곡은 멀리서 보면 온통 소나무 숲으로 보이지만 갈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등의 참나뭇과의 활엽수들이 빈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셋째는 낭산이 자신의 안식처인 도리천임을 알았다고 한다. 선덕여왕은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히길 소원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도리천이 어딘지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 선덕여왕은 낭산이라고 말했다. 선덕여왕이 낭산에 묻힌 지 32년 후 문무왕은 그 아래에 사천왕사를 창건했다. 불교에서 도리천은 사천왕 위에 있는 수미산 꼭대기의 부처님 세계를 말한다. 그래서 사천왕사 위쪽의 선덕여왕릉은 불교에서 말하는 도리천이 됐다. 선덕여왕의 생전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낭산은 산책하기에 좋다. 관광객이 붐비지 않아서 호젓하게 걷는 즐거움이 크다. 선덕여왕릉을 찾아가는 길은 사천왕사지를 가로질러야 한다. 사천왕사의 창건으로 자신의 예감이 적중해 도리천에 묻혔기 때문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철길 밑 시멘트 포장길을 걸어가면 넓은 보문들판이 펼쳐진다. 그 황금들판 가장자리에 선덕여왕 부친인 진평왕릉이 있다. 보문들판의 진평왕릉과 낭산의 선덕여왕릉은 죽어서도 부녀간의 애틋한 정을 나누고 있는지도 모른다.

선덕여왕릉에는 껍질이 붉은 소나무가 매력적이다. 굽은 허리에서 가지가 위로 뻗은 소나무는 살아있는 솟대처럼 보인다. 조금만 더 가면 아름드리 소나무 세 그루 앞에 선덕여왕릉을 중수한 기념비가 있다. 그곳에서 산봉우리로 시선을 돌리면 소나무 사이로 선덕여왕릉이 보인다. 여기서 선덕여왕릉까지는 그리운 여인을 만나러 가는 것처럼 마음이 급해진다. 심장 박동 소리도 예사롭지 않다. 그래도 천천히 걸으며 주변의 소나무를 유심히 살펴보는 게 좋다. 소나무가 선덕여왕릉을 중심으로 허리를 굽히고 있기 때문이다.

부채살 모양의 소나무 줄기 사이로 선덕여왕릉은 초록색 옷을 입고 있다. 그곳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선덕여왕릉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푸른 하늘의 햇살이 선덕여왕릉을 따사롭게 감싸고 있다. 깜깜한 무대의 주인공에게 비치는 한 줄기 빛처럼 소나무 숲에서 바라본 선덕여왕릉은 모든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하늘로 통하는 문이 있다면 선덕여왕릉에 햇빛이 비치는 이런 장면이 아닐까.

선덕여왕릉 앞 소나무에는 누군가 솟대를 조각해 놓았다. 선덕여왕을 사모했던 지귀(地鬼)의 못다 한 사랑에 대한 환생으로 솟대를 걸어 놓았을 가능성도 있다. 선덕여왕을 사모해 불귀신이 되었던 지귀가 선덕여왕을 지켜주는 솟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선덕여왕은 선견지명으로 신라를 통치했기 때문에 백성의 가슴에 한 송이 모란으로 기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경북대 기초교육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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