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 토크] 영화 ‘미옥’ 나현정役 김혜수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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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17   |  발행일 2017-11-17 제43면   |  수정 2017-11-17
연기 내공 30년…꿈꾸던 ‘니키타’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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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폭력적인 남성 세계에서 주도적인 여성 캐릭터가 있다는 점이 굉장히 끌렸다.” 영화 ‘미옥’은 타이틀롤을 거머쥔 김혜수의 말이 아니더라도 최근 한국영화 트렌드의 흐름에서 매우 흥미로운 지점에 놓여 있다. 남성들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누아르 장르, 게다가 여성은 보조적인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 비쳐보면 ‘미옥’은 의미있고 신선한 시도라 할 수 있다. ‘미옥’의 연출을 맡은 이안규 감독은 그런 편향된 제작행태에 반기를 들고 “누아르 장르에서 살아 숨쉬는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보고 싶었다”며 제작 의도를 밝혔다. 이는 “액션은 무서워서 그동안 기피했다”는 김혜수의 작품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으로 작용했다.

‘미옥’에서 김혜수는 범죄조직을 이끄는 2인자지만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나현정 역을 맡았다.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는 그녀 옆에는 조직의 해결사이자 현정을 사랑하는 임상훈(이선균)이 있다. 그리고 비리 검사 최대식(이희준)은 현정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잡히자 임상훈을 이용해 그녀를 제거하려 한다. 각기 다른 욕망과 이해관계를 가진 세 사람의 물고 물리는 과정이 시종 밀도있게 펼쳐진다는 점은 이 영화의 최대 미덕이다. “이 캐릭터를 품을 수 있는 배우는 김혜수밖에 없다”며 확신에 찬 감독과 전작들을 통해 남다른 카리스마를 뽐냈던 김혜수의 의기투합이 완성해낸 ‘미옥’은 그 점에서 대한민국 여성 누아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금석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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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액션영화인데 어땠나.

“사실 다른 촬영 일정 때문에 액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드라마 ‘시그널’에서 함께 작업했던 액션팀이라 부담이 덜했다. 솔직히 액션영화를 보는 건 즐겨하지만 직접 하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다칠까봐 두려워서인데 ‘미옥’을 선택한 이상 액션은 감수해야 했다. 나는 주로 다수의 남자와 합을 겨뤘고, 그러다보니 무기를 사용해야 했다. 폐차장 신에선 전기톱을 다뤘는데 힘 조절이 어려워서 촬영하고 나면 늘 근육통을 앓았다. 또 총은 왜 그리 무거운지 조준을 하려고 하면 손이 자꾸 내려갈 정도였다. 그래도 많은 분들의 배려 덕에 생각보다 순조롭게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액션은 초보지만 생각보다 잘 따라한 것 같아 나 스스로 대견하다. 신기한 건 적응이 되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춤추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기회가 다시 온다면 그때는 제대로 준비해서 도전해보고 싶다.”

▶이 작품이 끌렸던 이유 중 하나가 현정이 모든 것을 버리고 평범한 생활을 꿈꾸는 사람이란 점이라고 말했는데.

“그렇다. 현정은 정당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실감이 떨어지는 인물이다. 그런 현정이 성인이 된 후 평범한 일상을 꿈꾼다. 그게 공감이 됐다. 어떻게 보면 연기자도 비슷하다. 나는 운이 좋게 오랫동안 연기자로 살아왔지만 사실 보이는 것과 본질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꽤 많다. 그러다보니 종종 ‘이 길이 맞나?’ ‘지금이라도 그만두는 게 맞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점에서 현정의 마음이 이해됐다.”


평범한 일상 꿈꾸는 범죄조직 2인자 役
“다칠까봐 무서워 피한” 액션영화 첫 도전
“액션 연기 적응되니까 춤추는 듯한 기분”
전작 ‘차이나타운’ 이어 女 누아르 개척

“대학 때 뤽 베송의 ‘니키타’영화에 반해
친구에게 ‘김키타’라 부르라 했을 정도”
캐릭터 위해 헤어스타일 등 파격 변신
1주일에 한 번꼴 탈색에 화상을 입기도



▶여성이 주인공인 누아르라는 점이 신선했지만 역시나 모성이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그래서 그 부분이 오히려 차갑고 시크하게 처리됐으면 했다. 우리 영화의 정체성은 누아르인데 그것 때문에 장르적 색깔이 퇴색되는 건 싫었다. 현정은 어릴 때 아이를 낳았지만 직접 아이를 키우지 않았다. 그동안 범죄조직에 몸담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언더보스로 자기만의 삶을 살아왔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자기 아이가 나타났다고 모성 본능이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때문에 그 부분이 드라이하게 표현됐으면 했다. 대신 영화가 끝나면 남아 있는 여운이 확 올라오게 하고 싶었다. 보기에는 단순하고 간결해 보여도 많은 고민을 했던 부분이다. 모성을 보여주는 방식을 일부러 다르게 할 필요는 없지만 결국 같은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면, 그 과정을 다르게 풀어가면서 감정을 배가시키는 방법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다만 내가 생각한 것만큼 제대로 전달됐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건 관객들이 평가해줄 부분이다.”

▶‘차이나타운’에 이어 국내 여성 누아르의 또 다른 장르를 개척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성 누아르 장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그건 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뤽 베송 감독의 ‘니키타’를 보고 너무 멋지다고 생각했다. 친구들에게 나를 ‘김키타’로 부르라고 했을 정도다. 현실 속에서 만날 수 없는 여전사들을 스크린에서 보는 건 정말 신나고 멋진 일이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장르는 일부러 찾아서 본다. 영화로 발현할 것들이 곳곳에 있고, 일상적인 것을 일상으로 다루지 않고, 뭔가 밀도 있는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항상 여운을 남긴다. 그런 영화를 자주 접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솔직히 누아르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매혹’이라는 키워드가 늘 존재해 있기 때문이다. 설사 반향이 크지 않더라도, 흥행이 좀 안되더라도 끊임없이 등장하는 이유다. 다만 여성이 중심이 된 누아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이제 관객들도 여배우들이 중심이 돼 역량을 마음껏 펼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미옥’이 그 발판이 되었으면 한다. 지금은 김혜수의 누아르물로 초점이 맞춰졌지만 분명 나보다 더 잘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절대 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설사 그렇더라도 계속 도전했으면 좋겠다. 대다수가 진심으로 이런 영화를 보고 싶어하고 응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번 작업을 통해 느꼈다.”

▶다른 작품보다 더 파격적인 외적 변신을 선보였다. 헤어 스타일과 패션에 직접 관여했다고 들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제안을 하겠지만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하는 편이다. 이번 나현정 캐릭터는 외적인 변화도 컸고, 장르의 특성상 요구되는 부분이 있었다. 강렬하고 차가운 인상이다. 나현정이 위장한 작업 공간의 특징 등을 특히 염두에 뒀다. 각 팀들과의 의견교류와 소통을 통해 조율과 테스트를 거친 후 감독님이 최종 결정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이번 작업에서 나현정의 헤어스타일은 직접 제안했고 감독님, 분장팀, 의상팀과 회의를 거쳐 영화 속의 형태로 표현됐다. 의외로 짧고 밝은 헤어스타일을 유지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일주일에 한 번은 탈색을 해야 했는데 삭발한 우측 두피와 얼굴 가장자리에 약품으로 인한 미세한 화상을 입기도 했다.”

▶감독들은 당신에게 “가만히 있어도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배우”란 수식어를 단다. 실제의 김혜수는 어떤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죽겠다. (웃음) 나는 전혀 강하지 않다. 또 강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물론 내가 하는 일은 강해야 될 때가 많다. 오기도 있어야 하고, 흔히 말하는 ‘깡’으로 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런데 나는 깡을 타고나지 않았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나. 그나마 체력은 타고난 것 같다. 지금까지 버텨온 것도 타고난 체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선균과의 호흡은 어땠나. 같은 소속사인데.

“매일 출근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같은 소속사라도 만날 일이 없다. 솔직히 같은 소속사인지도 나중에 알았다. 선균씨는 워낙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상훈 역할이 되게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감정 표현을 마치 분화구처럼 쏟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감정을 숨기는 것보다 폭발하는 연기가 쉽다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래서 누가 이 역할을 하게 될지 되게 궁금했는데 선균씨가 캐스팅됐다고 해서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선균씨 입장에선 큰 도전이라 할 수 있다. 악역인 데다 이야기가 시종 상훈의 감정을 따라가다보니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선균씨와 극중에서 좀 더 호흡을 맞춰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차기작인 ‘국가부도의 날’은 어떤 영화인가.

“IMF를 다룬 영화인데 시나리오를 보고 화가 나서 잠을 못 잤다. 나도 몰랐던 당시 이야기들을 접하고 나서 가슴이 정말 답답했다. 그래서 반드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다. 오는 12월 촬영에 들어간다.”

▶‘미옥’이 만들어졌지만 사실 여배우의 설자리는 점차 줄어들고 있다. 누구보다 오랫동안 톱배우로 현장을 지켜온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항상 과도기 과정에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시스템이 지금보다 훨씬 선진화되고 모두의 개념이 잘 정착돼 있다 하더라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관건은 당사자들이 얼마만큼 준비가 돼 있느냐다. 그런 현실을 비판하고 분노만 할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 닥치더라도 당당히 마주하고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해결할 수 있는 능력도 생긴다고 본다.”

▶한국에서 여배우로 산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 같은 경우는 인생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의미를 규정짓지 못해 아직까지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편으론 그 의미를 규정짓는다는 게 과연 필요하고 가능한가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이 일을 하면서 철들었고 세상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나의 가치관, 취향, 내가 판단하는 모든 것들이 연기자로 살아온 그 연장선상에서 성장하고 발전해왔다. 때문에 여배우로 산다는 건 어찌 보면 내 인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글=윤용섭기자 hhhhama21@nate.com
사진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 강영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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