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11] 영남사림의 영수이자 뛰어난 문장가였던 ‘김종직(金宗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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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20   |  발행일 2017-11-20 제13면   |  수정 2017-11-20
[조선 문과] 세조 5년(145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 20위
16세에 응시한 과거 낙방했지만 “훗날 대제학이 될 솜씨” 극찬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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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직을 배향하고 있는 구미 선산의 금오서원. 서원의 강당인 정학당 대청에서 바라본 읍청루의 모습이 김종직의 강직한 성품을 닮은 듯하다. <영남일보 DB>

장원방이 배출한 인재이자 영남사림의 기틀을 마련한 김숙자(金叔滋)는 종보(宗輔)·종익(宗翼)·종석(宗碩)·종유(宗裕)·종직(宗直) 등 다섯 아들을 두었다. 5형제 중 셋째 종석, 막내 종직이 대를 이어 과거(대과)에 급제해 집안의 명예를 드높였다. 밀양 외가에서 태어났지만 이들 역시 선산 장원방을 드나들며 학문을 닦았다. 선산이 사실상 고향이나 다름없었다. 장원방은 15명의 과거급제자가 나온 옛 영봉리를 말하며, 지금의 선산읍 이문리·노상리·완전리 일대를 일컫는다. 특히 김종직(1431~1492)은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정통성리학을 계승한 영남사림의 영수로 명성을 떨쳤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의 단서를 제공하고 부관참시의 화를 입었지만, 조선 전기 훈구파에 대항한 사림파의 거두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김종직은 세조에서 성종대에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지낸 관료이면서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장가이기도 했다. 장원방이 배출한 그의 형 김종석(1423~1460)도 세조 2년(1456) 식년시에 합격해 벼슬이 성균관직강에 이르렀지만 아쉽게도 38세의 짧은 생을 살다 세상을 뜨고 말았다.

#1.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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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 34권, 세조10년(1464) 8월6일 정해 첫번째기사에는 김종직이 잡학을 권장하는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이 일로 김종직은 파직을 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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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일기 30권, 연산4년(1498) 7월15일 기유 네번째기사. 유자광이 조의제문을 지은 김종직에게 죄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어린 김종직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차라리 다 읽어버려야겠어. 그럼 아버지도 더는 뭐라고 안 하시겠지.”

밀양의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선산 영봉리(장원방)의 아버지 곁으로 돌아온 종직은 솔직히 공부가 지겨웠다. 진중한 형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가만히 들어앉아 책을 읽는 데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당연히 아버지 김숙자의 꾸지람이 이어졌고, 그날도 한바탕 혼이 난 뒤끝이었다. 그래서 든 생각이 ‘읽어치우자’였다.


정몽주-길재-김숙자의 성리학 계승
어린시절부터 문장력 매우 뛰어나
벼슬길 오른 후 어명으로 많은 글 남겨
성종 ‘동국여지승람’ 수정 맡기기도

잡학을 권장하는 세조를 비판해 파직
세조 왕위 찬탈 비판했던 글이 화근 돼
무오사화 빌미…사후 부관참시 극형

훈구파에 대항한 사림파의 거두 각인



그런데 막상 읽어 들어가니 제법 재미가 있었다. 종직은 순식간에 천자문(千字文)과 동몽선습(童蒙先習)을 떼고 사서(四書)를 들추기 시작했다. 아버지 김숙자가 흐뭇해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를 계기로 김종직은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 학문을 체계적으로 쌓아갔다. 이때 김종직은 성리학의 맥을 온전히 짚을 수 있었다.

그러던 1446년(세종 28), 김종직이 16세가 되던 해였다. 어린 나이에 야심차게 응시한 과거에서 낙방하고야 말았다. 그런데 김종직이 제출한 답안 ‘백룡부(白龍賦)’가 시험감독관인 김수온(金守溫)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오죽했으면 “훗날 문형(文衡, 대제학)이 되고도 남을 솜씨”라며 세종에게 보여주었을 정도였다. 세종도 그 실력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다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며 영산훈도(靈山訓導, 고을시학관)를 맡기는 것으로 격려의 마음을 표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453년(단종 1), 김종직은 단종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치러진 계유증광시 소과를 통해 드디어 진사가 되었다. 형 종석, 종유도 함께였다. 삼형제의 나란한 급제에 영봉리가 기뻐했다. 이후 형 종석은 대과에 응시했다. 1456년(세조 2)에 정기시험으로 치러진 식년시였다. 이 시험에서 김종석은 정과(丁科) 21위로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당시 34세였다. 이후 벼슬이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정5품)에 이르렀다. 하지만 김종석은 1460년 38세의 짧은 생을 살다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김종직은 1459년(세조 5) 3월27일 치러진 기묘5년방(己卯五年榜)을 통해 정과(丁科) 20위로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이 무렵 김종직에게는 벌써 제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김종직의 학문과 인품에 감화 받은 이들이었다.

#2. 임금으로부터 신임

벼슬길에 오른 김종직은 형의 몫까지 최선을 다했다. 성종이 예문관의 인원을 늘려 그들로 하여금 경연관(經筵官)을 겸하게 하였을 때는 수찬(修撰, 정5품)에 임명되기도 했다. 경연관이 왕의 학문을 지도하는 관직이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이었다.

이후 김종직은 어머니의 봉양을 이유로 지방과 중앙을 번갈아 드나들었다. 1471년 함양군수(咸陽郡守), 1475년 승문원참교(承文院參校, 종3품)와 선산부사 등을 지냈다. 하지만 영남에서 관직생활을 하던 그 시절이 김종직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기가 되었다.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 훗날 사림파를 대표하는 학자들과 인연을 맺은 때문이었다. 그러던 김종직은 1479년 어머니를 여읜 후 금산에 머물다가 1482년(성종 13) 성종의 부름을 계기로 중앙에 복귀하였다.

김종직은 성종으로부터 무척이나 신임을 받았다. 조강(朝講)과 주강(晝講) 등 심도 있는 토론 자리면 성종이 으레 불러 함께하도록 했다. 승진도 순조로워서 홍문관응교, 직제학, 부제학, 동부승지, 도승지, 각 부서의 참판 등 요직이란 요직은 두루 거쳤다. 하지만 1489년 형조판서를 마지막으로 김종직은 밀양의 옛집으로 돌아갔다. 몸에 병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1492년(성종 23)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성종이 안타까워했음은 물론이었다.

이때 김종직에게 내려진 시호는 ‘문간(文簡)’이었다. ‘문학이 넓고 본 것이 많다’ 하여 문(文), ‘경(敬)에 거하고 간소하게 행동한다’ 하여 간(簡)이었다. 하지만 김종직은 이미 스스로를 ‘점필재(畢齋)’라고 부르고 있었다. 점필재는 ‘예기(禮記)’의 ‘학기(學記)’에 나오는 신기점필(呻其畢)에서 비롯된 단어였다. 신기점필은 눈에 보이는 가벼운 것만 되뇌느라 깊은 뜻에 닿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켰다. 즉 점필재란 신기점필의 반대, 학문과 삶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을 담은 호였다.

#3. 문장가 점필재의 명성

김종직은 어린 시절부터 문장이 아주 뛰어났다. 20세가 되기 전부터 여러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을 정도였다. 극찬을 받은 ‘백룡부’가 16세 때 작품이었던 것을 보면 충분히 알 만한 실력이었다. 그런 그가 과거에 급제해 승문원(承文院)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 종9품)가 되었을 적의 일이었다. 당시 승문원의 선배였던 어세겸(魚世謙)이 김종직의 시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보고 말채찍을 잡고 하인이 되라 해도, 내 달게 받아들이겠다.”

이를 왕들이라고 모를 리 없어서 김종직은 어명에 따라 수많은 글을 남겼다. 세조 대에는 왕세자빈이었던 한씨(韓氏)를 애도하는 애책문(哀冊文)을 지었고, 성종 대에는 인수대비의 옥책문(玉冊文, 국왕·왕비·대비 등에게 존호를 올리는 글)과 예종의 시책문(諡冊文, 임금의 시호를 정할 때 생전의 업적과 덕행을 칭송하는 글) 등을 짓는 데 참여하였다. 특히 성종의 총애는 남달랐다. 수많은 글을 짓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수정을 맡기기도 했다. 김종직의 문장이 두루 쓰인 데 대해 ‘성종실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종직은 문장을 잘 지었다. 당연히 이에 대한 처우도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차례를 건너뛰고 연달아 승진한 것이 그것이다. 이에 사림(士林)이 다 눈을 씻고 그가 하는 일을 바라보았다.”

#4. 비극을 불러들인 글

김종직은 정통성리학에 대한 신념이 강했다. 그로 인해 파직을 당한 적도 있었다.

1464년(세조 10) 한여름의 일이었다. 잡학을 비판하는 김종직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편전을 울렸다.

“지금 문신들로 하여금 천문, 지리, 음양, 율려(律呂, 일종의 음악이론), 의약(醫藥), 복서(卜筮, 점), 시사(詩史) 등 7학(學)을 나누어 공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시사야 본래 유학자의 일이니 그렇다 쳐도, 그 나머지는 잡학(雜學)일 뿐입니다. 유자들이 힘써 배울 만한 학문이 결코 아닙니다.”

잡학을 비판하는 김종직의 말에 세조가 발끈했다.

“그 7학을 하는 자들이 죄다 변변치 못해서 너희들로 하여금 배우도록 한 것 아니더냐. 그러면 그 잡학에 관심을 둔 나는 뭐이더냐? 괘씸하구나. 파직시키라.”

하지만 보다 심각한 문제는 김종직이 세상을 뜬 이후에 일어났다. 바로 ‘조의제문(弔義帝文)’이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초나라 의제(義帝, 희왕)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 27세에 쓴 글이었다. 숙부인 항우에게 희생당한 어린 조카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글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자 비난이었다.

그런데 이 글을 사관으로 있던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초(史草)에 수록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1498년(연산 4) 이를 알게 된 유자광(柳子光, 1439~1512)이 들고 일어났다.

“김종직의 말이 도리에 맞지 않아도 보통 안 맞는 것이 아닙니다. 법에 의하여 그 죄를 다스리소서.”

안 그래도 유자광은 김종직에 대한 원한이 깊은 자였다.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관내의 정자에 걸린 유자광의 시를 보고 “그 따위”라고 하며 거두어 태워버린 일 때문이었다. 유자광의 참소는 곧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확대되었다. 훈구파가 사림파 탄압에 나서면서 피바람이 거세게 지나갔고, 그 환란은 죽은 김종직도 피하지 못했다. 그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관이 끌어내어져 시신이 훼손되는 부관참시(剖棺斬屍)의 극형이 그에게 내려지고 말았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끔찍한 비극은 김종직이라는 이름을 후대에 더 깊이 각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무오사화하면 김종직이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그것이다. 사림파의 영수로서 사림파의 존재를 더욱 진지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해준 고귀한 희생이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도움말=박은호 전 구미문화원장
공동 기획 : 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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