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에 행복을 심어 나누다

  • 이춘호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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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24   |  발행일 2017-11-24 제33면   |  수정 2017-11-24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독림가(篤林家)’우상태
先代의 산지 개발돼 받은 보상금
24년 前 99만㎡ 청도 함박산 구입
교육행정가서 독림가로 제2의 삶
‘우상태 버전 산림공화국’이 목표
20171124
49세부터 독림가의 삶으로 변신하기 시작한 교육행정가 출신의 우상태 <주>E·G·T수목원 대표. 청도 함박산을 산림인문학이 살아숨쉬는 치유의 숲으로 만들기 위해 부모를 청도 함박산 참나무 아래 수목장으로 모셨다. 부모 옆의 한 바위는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 고단하기만 했던 지난 세월을 물끄러미 반추해보는 우 대표의 쉼터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대지는 산(山)의 연장인 것 같다. 산생산사(山生山死)! 태어날 때도 인간은 산의 영향을 받는다. 그렇게 살다가 기력을 다 잃어 죽으면 다시 산의 품에 안겨 영면에 든다. 산은 생과 사가 교차하는 곳. 이승이면서 저승이다. 그래서 늘 신령하다. 선조들은 산을 삶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으로 봤다. 그래서 큰일이 있을 때마다 산에서 천지신명을 향해 고유제(告由祭)를 지냈다.

수목은 생명을 살린다. 그리고 수(壽)를 다한 육신을 다시 흙으로 돌려보내준다. 숲은 삶의 대전제. 당연히 산은 삶 이상의 그 뭔가를 품고 있다. 그래서 산은 ‘일상’이 되기 힘들었다. 그런데도 오직 산만의 삶을 산다는 건? 기구한 팔자거나 아프거나 은둔자일 것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는 분명 새로운 운명을 만들려는 자일 것이다.

요즘 ‘나는 자연인이다’ 버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하지만 그들의 행세를 보면 반자연인인 경우가 많다. 자연을 동경하고 외경시하면서 살 수는 있어도 스스로 자연인이라고 선언하는 것, 그건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나는 올해 73세의 우상태. 뼛속 깊이 ‘대구 사람’이다. 잠시 밥벌이를 위해 한두 해 상경한 걸 빼곤 줄곧 대구에서만 살았다. 그래서 한 다리만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다. 어린 시절 내 놀이터는 효성유치원, 계산성당, 제일교회, 약전골목 등이었다. 6·25전쟁 때문에 부모님 따라 수성교까지 피란 가다가 되돌아온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몇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어린 시절 성탄절날 제일교회 2층 예배당에서 영화 상영 중 누가 장난삼아 “불이야”라고 고함치는 바람에 4명이나 압사하는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이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간염 때문에 또 몇번 사경을 헤맸다.

성장기, 난 집안 형편이 괜찮아 당시 부자들만 살 수 있다고 하는 중구 계산동 옛 고려예식장 바로 옆에서 살았다. 조부와 아버지는 스포츠맨이었다. 특히 야구를 잘했다. 아버지는 일제강점기, 현재 한국전력의 전신인 남전(南電) 소속 야구팀 투수였다. 나도 그 유전자를 받아 한때 촉망받던 야구선수였다. 스포츠용품이 귀했던 1950년대였지만 나는 그 귀한 야구 글러브를 가질 수 있었다. 틈만 나면 골목에서 아버지와 야구를 했다. 덕분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시합에 출전하게 됐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렇게 자상하게 내 야구실력을 점검해주시던 아버지가 어느 날 수영 중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설상가상 경북고 2학년 때 교장이 느닷없이 학업에 도움이 안 된다면서 야구부를 전격적으로 해체해 버렸다. 다른 야구 명문으로 전학 갈 수도 있었지만 내 야구인생은 거기까지였다.

경북고 44회 출신. 동기들은 다 출세했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제대 후 첫 직장은 서울의 농업진흥공사(현 한국농어촌공사) 기획실. 이내 향수병에 걸렸다. 가족과 친구가 그리워 귀향해 버렸다. 한국사회사업대(현 대구대) 교무처로 직장을 바꾼다. 거기서 대외협력 업무를 맡아 출장을 많이 다녔다. 사회교육원 생활체육부장이 됐을 때 나는 테니스와 골프장 관리까지 맡았다. 현재 경산세무서 자리에 있었던 내 개인농장에 지역 첫 야외골프연습장을 만들었다. 벙커, 그린 등을 손수 시공했다. 하지만 야구에 이어 골프도 내 길이 아니었다. 이후 나는 교육행정가의 삶을 걸었다. 경북외국어대, 경북과학대 등 대학교 설립인가 관련 작업에 관여하게 됐다. 뭔가 1% 부족한 나날이었다. 그러다가 1993년 꽤 넓은 면적의 산을 갖게 되었다. 내 나이 49세부터 ‘독림가(篤林家)’의 길을 걷게 된다. 지천명이 되어서야 2부 인생의 화두가 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그건 우상태 버전의 ‘산림공화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산’이란 단어를 집어넣으면 내 삶의 얼개는 기가 막히게 ‘선순환(善循環)’하기 시작했다.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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