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포항지진이 들려주는 이야기

  • 김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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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1-28   |  발행일 2017-11-28 제30면   |  수정 2017-11-28
지진이라는 국가적 재난
국민 안전과 수능시험에
지도자 적절한 의사결정
정부 신속한 대처 돋보여
남은 건 포항경제 살리기
[화요진단] 포항지진이 들려주는 이야기

포항에서 근무한 지 2년 가까이 돼 간다. 길지 않은 기간임에도 아주 특별한 경험을 두 번이나 했다. 우리나라에서 발생한 첫째, 둘째 크기의 지진을 고스란히 몸으로 겪었다. 지난해 9·12 경주 지진(규모 5.8)은 2층 숙소에서, 11·15 포항 지진(규모 5.4)은 8층 사무실에서 맞았다. 경주 지진 때는 아주 많이 놀랐고, 포항 지진 때는 공포를 느꼈다. 다른 자연재해와 달리 지진은 경험할수록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공포감이 커진다. 본진이 발생한 지 2주일이 다 됐지만 작은 소리, 작은 울림에도 깜짝깜짝 놀란다. 포항 시민 대부분이 겪고 있는 일종의 지진 트라마우다.

포항 지진은 자연재해의 공포와 함께 국가의 존재 이유, 지도자 리더십의 중요성, 노블레스 오블리주(지도층의 사회적 책임 실현) 실천 등 적잖은 교훈도 동반했다. 세월호 사태, 국정 농단 등을 거치면서 우리는 ‘이게 나라냐’라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해왔다. 대형 재난에 속수무책이고, 한순간에 정권이 무너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과연 정상적인 국가에 살고 있는지를 의심해 왔다. 세월호 사태와 국정 농단의 학습효과 탓일까, 이번 포항 지진에 대한 정부의 대응 방식은 과거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경주 지진과 포항 지진 대처 방안을 살펴보면 큰 차이가 난다. 경주 지진 때는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가 지진 발생 다음 날 경주 지진 현장을 방문했지만, 별다른 대책 제시도 없이 피해 지원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 하고 돌아갔다. 이번 포항 지진 때는 지진 발생 당일 이낙연 총리가 피해 현장을 방문, 재난안전특별교부세 40억원을 당장 집행하겠다고 약속했다. 특별재난지역 선포도 언급했다. 이후 지진 발생 6일 만인 지난 20일 포항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했다. 경주는 지진 발생 11일 만에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다.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놓고 전 정부는 이것저것을 따졌고, 현 정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국가의 존재 이유 중 첫째는 국민의 생명과 안위를 지키는 일이다.

특히 수학능력시험의 전격적인 연기 결정은 지도자의 정확한 상황 판단과 신속한 의사 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말해준다. 수능 하루 전날 지진이 발생, 포항 지역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극도의 불안감에 휩싸였다. 학부모 사이에는 수능을 연기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럼에도 당초 교육 당국은 이날 오후 6시까지도 수능은 예정대로 치른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런 기류는 오후 6시30분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의 포항 방문을 계기로 급속히 바뀌었다. 경북도지사, 포항시장 등이 포항 지역 분위기를 전하며 김 장관에게 수능 연기를 건의했고, 김 장관이 이 건의를 청와대에 즉각 보고하면서 오후 7시30분 전후 수능 연기가 전격 결정됐다. 이 같은 결정 덕분에 포항지역 수험생들은 무사히 수능을 치를 수 있었다. 지난 22일 실시된 한 여론조사기관의 조사 결과 국민 83.6%가 수능 연기 결정은 잘한 것이라고 응답했다. 지도자들의 결정이 옳았음을 방증한다.

지진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피해 현장 복구에 지쳐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소식은 용기를 준다. 이강덕 포항시장은 월급을 쓰지 않고 모아둔 1억여원을 성금으로 내놓았다.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은 포항과 특별한 연고가 없음에도 사재 10억원을 기부했다. 유명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들의 성금 기탁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지진으로 철거 대상이 된 대동빌라 이재민들은 노인과 어린이 가구에 입주를 양보했다. 당초에는 추첨으로 입주 순서를 정하기로 했다. 아무리 힘든 역경도 함께하는 이웃이 있으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 이들이 있어 포항은 지진이라는 초유의 재난을 힘겹지만 거뜬히 이겨가고 있다.

포항이 진짜 걱정하는 것은 지진이 지역 경제 위축으로 이어지는 2차 피해다. 이제 포항을 돕는 일은 포항을 많이 찾아주는 일이다. 죽도시장에서 제철 과메기도 먹고, 포항크루즈도 타고, 호미곶도 둘러보자. 포항 시민들은 지진으로 취소한 모임 날짜를 다시 잡고, 기업들은 직원 회식도 자주 하자. 지역 경제가 살아나야 지진 트라우마도 사라진다. 김기억 (동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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