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밀양 금시당·백곡재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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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08   |  발행일 2017-12-08 제36면   |  수정 2017-12-08
“온통 노랗게”…450년의 가을을 마당에 떨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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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전면에 금시당, 오른쪽 축대 위에 백곡재. 배롱나무는 담장 너머로 몸을 뻗었고 백송은 홀로 푸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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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당 이광진이 직접 심었다는 450년 된 은행나무. 수고 22m, 둘레 5.1m로 거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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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막한 담장 앞의 섬돌. 자신을 밟고 올라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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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시당 백곡재 일원의 특이한 담장.

절정이 되면, 은행나무는 하루 사이에도 잎을 모두 떨어뜨린다. 소나기 소리를 내며 단번에. 그 하루가 지난 오늘, 나무는 순수하고 대범하고 태연하다. 광택이 흐르는 배롱나무는 담장 너머로 몸을 굽혀 강을 내려다본다. 마당에는 뿌리 같은 나무들, 그 사이 백송이 푸르다. 그의 하얀 껍질은 선비들이 추구하는 맑은 정신을 뜻한다던가. 담장 아래 섬돌은 자신을 밟고 올라서라 한다. 망루처럼 멀리 보고 각오처럼 중심을 잡으라 한다. 해와 달의 시간은 일가도인처럼 흐르지만, 계절은 언제나 지금이 옳다. 밀양 금시당의 늦가을이다.

강 따라 산으로 향하는 길 올라 마주한
절벽과 긴 담벼락·3칸 대문채·기와지붕
대문 들어서니 널찍한 마당 가득 은행잎
이광진이 세운 금시당과 그가 심은 나무

도연명의 귀거래사서 구절 따온 금시당
임란 때 불타 1744년 후손 백곡이 복원
금시당 옆 백곡 기려 1860년 지은 백곡재
‘닮은’ 두 건물 온돌방·마루 배치만 반대


◆ 금시당의 은행나무

강 따라 산으로 향하는 길은 시멘트 길이다. 산으로 들자 널찍한 흙길인데 옹벽 공사가 한창이다. 굉음과 먼지가 뇌우 같고 안개 같다. 사위는 금세 조용해진다. 하늘을 보니 태양이 천중이다. 머지않아 늘씬늘씬한 나무들 사이로 강으로 가파르게 쏟아지는 절벽과 긴 담벼락과 3칸 대문채와 뒤돌아선 기와지붕이 보인다.

낮은 돌계단을 올라 대문 안으로 들어선다. 홀과 같은 작은 마당 왼쪽에는 높은 기단 위에 주사로 보이는 번듯한 건물이 있고 그 옆으로 3칸 중문이 나 있다. 중문 너머에는 정면 5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큼직한 건물이 있다. 예전에는 무릉헌(武陵軒)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두 건물은 관리사로 최근에 고쳐 지은 듯하다. 고졸한 맛은 없으나 산뜻하다. 댓돌에 신발이 놓여 있고 내부에 기척이 느껴진다.

오른쪽에는 협문이 나있다. 협문으로 나가면, 맞닿을 듯한 두 개의 추녀 아래에 매화나무가 넓게 가지를 펼치고 있다. 백년이 훨씬 넘었다는 토종 매화로 아직도 큼직한 매실이 열린다고 한다. 화석 같은 주름을 가진 굵은 가지는 도도한 수평인데 수많은 어린 가지들은 호기심에 가득 찬 채로 일제히 하늘을 향해 서있다. 그 너머로 널찍한 마당이 펼쳐진다. 노랗다. 마당이 온통 노랑이다.

마당의 저편 끝 모서리에 하늘 가득히 퍼져서 자라난 은행나무가 서있다. 저편에서 이편까지, 담장 너머 더 먼 저편까지, 일체의 공간을 노랗게 뒤덮어버린 나무가 뿌리처럼 경건하게 서 있다. 지난 계절 있는 힘을 다하여 성장했던 나무는 최후의 광채를 뿜은 뒤 이제 완전한 정적으로 고조되어 있었다. 세계는 사람을 내모는 일 없이 투명하고 안정적인 밝음으로 가득 차 있고 나무는 그 밝음 위에 자신의 그림자를 가만히 눕혀 놓고 있다. 450여 년 전 이 나무를 심고 흙을 톡톡 다지고 물을 흠뻑 주었던 이는 금시당(今是堂) 이광진(李光軫)이었다고 한다.

◆ 금시당과 백곡재

뒤돌아보면 사람은 없고 금시당이 소리도 없이 마주 보고 있다. 여주이씨 이광진은 명종 때의 문신으로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병조 좌랑과 정랑을 지낸 인물로 고려 말 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인 문절공(文節公)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의 후손이다. 명종의 시대는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외척들의 권력농단, 그리고 임꺽정의 발호로 얼룩져 있던 혼란의 시대였다. 그 한가운데에 20년을 몸담았던 그는 문정왕후의 죽음 이후 벼슬을 버리고 이곳 고향으로 돌아왔다. 금시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 ‘지금이 옳고 지난 삶이 그릇됨을 깨달았네(覺今是 而昨非)’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그는 이곳 밀양강의 지류인 남천 가에 터를 잡고 별서를 경영하고자 했는데, 귀향한 이듬해인 1566년 금시당의 완성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54세였다. 이후 금시당은 그의 아들 근재(謹齋) 이경홍(李慶弘)이 선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후진을 양성하는 강학소로 사용했다.

금시당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영조 때인 1744년에 이광진의 5세손인 백곡(栢谷) 이지운(李之運)이 복원했다. 이지운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소학을 중심으로 많은 후진을 양성했던 학자로 이곳에서 문중의 유고와 실기를 모아 철감록(感錄)을 편찬했다. 훗날 문중에서는 철감록에 실린 이행의 글과 자료를 따로 모아 기우집(騎牛集)을 발행했는데 이 책에서 처음으로 두문동 72명의 명단을 확정했다고 한다. 이후 1867년 선생의 10세손 무릉옹(武陵翁) 이종원(李鍾元)과 11세손 만성(晩醒) 이용구(李龍九)가 문중의 뜻을 모아 원래 건물을 해체한 뒤 크게 중수한 것이 현재의 금시당 건물이다. 현판이 대청 안에 걸려 있다.

금시당 오른쪽에서 강을 바라보는 건물은 백곡재(栢谷齋)다. 이용구가 이지운을 추모하기 위해 철종 11년인 1860년에 지은 건물이다. 역시 대청 안쪽에 백곡서재(栢谷書齋) 현판이 걸려 있다. 금시당과 백곡재는 제도와 양식 및 규모까지 대체로 동일한데 온돌방과 마루의 배치가 반대 방향이다. 은행나무를 바라보는 금시당은 대청의 판문을 열면 강이 보이고, 강을 바라보는 백곡재는 대청의 판문을 열면 은행나무가 보인다.

◆ 잣나무 골짜기, 백곡

이곳은 예부터 아름드리 잣나무가 숲을 이룬 경승지로 마을 이름도 백곡, 잣나무 골짜기다. 뒤로는 산성산 일자봉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용두산(龍頭山) 능선이 내려가고 왼쪽으로는 호두산(虎頭山) 능선이 내려간다. 금시당과 백곡재는 용과 호랑이의 꼬리가 맞닿은 자리에 위치한다. 용호의 꼬리를 대범하게 누르고 앉아 온화하게 천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원래는 백곡사(栢谷祠)가 있었다고 한다. 정조 24년인 1800년 사림들이 지어 이행과 그 5세손 이태, 6세손 이광진, 7세손 이경홍 등 여주이씨 명현들을 향사했다. 그 뒤 ‘세덕사(世德祠)’ ‘백곡서원(栢谷書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고종 때 훼철되었다. 문절공 이행의 별호는 ‘일가도인(一可道人)’이다. 이씨왕조에서 붙인 이름으로 ‘한 가지만 옳다고 내세우는 고집불통의 사람’이란 의미다. 생각해보면 ‘일가도’에는 그때와 지금, 옳고 그름의 분별이 없다. 또 생각해 보면 ‘지금이 옳다’는 말에는 회한과 위로가 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부산고속도로 밀양IC로 나가 울산, 언양 방향으로 우회전한다. 600m 정도 가다 남기리, 용평 방향으로 나가자마자 금천교 건너 바로 우회전한 뒤 강변도로를 따라 계속 직진한다. 오른쪽으로 활성교를 지나치면 곧 금시당, 백곡재 이정표가 있다. 산길 초입에 주차할 공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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