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냄비근성 유감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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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11   |  발행일 2017-12-11 제31면   |  수정 2017-12-11
[월요칼럼] 냄비근성 유감
원도혁 논설위원

예천 출신으로 대구 대건고를 졸업한 시인 안도현은 1984년 ‘서울로 가는 전봉준’이라는 명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동학 농민운동 선봉장인 녹두장군이 잡혀가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를 돕지 못하고 무기력했던 민초들의 심정을 잘 표현했다. 조선호랑이처럼 같이 모여 울어주지도 못했고, 더운 국밥 한그릇 말아 주지도 못한 비겁함을 반성하던 그 글귀가 아직 뇌리에 선연하다. 그가 쓴 ‘연탄재 함부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라는 유명한 시도 있다. 우리가 흔히 ‘연탄’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이 시의 제목은 ‘너에게 묻는다’이다. 시인의 준엄한 일갈이 마치 졸고 있는 수행자에게 내리치는 스님의 죽비같다. 연탄의 효용가치에 철학적 의미까지 부여한 그 시가 생각나는 것은 따스함이 절실한 계절 탓인가?

요즈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인물 중 단연 톱은 이국종 아주대 외상센터 교수다. 총알을 다섯발이나 맞아, 그의 표현대로 ‘깨진 항아리’같던 북한 귀순 중상자를 5시간의 대 수술로 살려내 본인의 실력과 함께 대한민국의 국격을 드높였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이 격려한 것처럼 ‘기적같은 일’을 해낸 우리 시대 진정한 칼잡이 외과의사다. 영웅처럼 떠받들어져도 자격이 충분하다. 경북대병원을 비롯, 현재 완비된 9곳을 포함해 모두 17개소가 지정돼 있는 권역외상센터의 내년 예산을 200억원 이상 증액시키는 데 공을 세운 그다. 중증 외상환자들의 생명유지 골든타임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지역별로 권역외상센터가 완비돼 잘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이런 지적도 나온다. 또 한국인의 냄비근성이 발동해 자글자글 끓고 있다고 못마땅해 한다. 지적대로 사실 우리는 무슨 큰일 터지면 우르르 떼로 몰려가 지지고 볶는 것을 잘한다. 그러다가 얇은 냄비 식어버리듯 조금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북한 귀순병 사건 말고도 일련의 사태들이 작금 한국인의 냄비근성을 잘 대변하고 있다. 얼마전 전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어금니 아빠 사건이 대표적이다. 아버지가 장애 딸을 이용해 동정심을 유발한 뒤 억대의 후원·지원금을 받아 외제차를 굴리는 등 흥청망청 탕진한 사건이다. 행정기관의 복지 담당자가 미리 이들 가족의 실태를 파악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언론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기자들 역시 사태의 본모습을 파악하지 못하고 너도나도 과대포장 미화시키는 데 일조했기 때문이다. 쉽게 끓는 냄비근성의 발동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요근래 홈쇼핑이나 인터넷 쇼핑몰을 통해 법석을 떨었던 먹거리 파동은 또 어떤가. 우리 몸에 크게 이롭다는 이른바 ‘슈퍼 푸드’가 반짝 떴다. 면역력 증강에 도움되는 셀레늄의 보고라는 브라질넛이나 오메가3의 대표 식물 사차인치 등 이름도 생소한 견과류를 비롯한 건강 보조식품이 한동안 유행했다. 필자도 칠성시장에까지 가서 사오곤 했던 먹거리들이다. 그런데 지금은 시들해져 브라질넛이 집 베란다 뒤 구석 어디에 얼마나 처박혀 있는지 파악조차 안된다. 이런 실상이 어디 나에게만 해당되겠는가 싶다. 역시 한국인의 유전자에 내재된 냄비근성의 발현이 아닐 수 없다. 인천 앞바다 낚싯배 충돌 전복 사고도, 세월호 참사도 마찬가지다. 오래도록 기억되고 단계적으로 재발 방지책이 완전히 마련돼야 하는 일들이다. 그런데 금세 잊어버리고 또 비슷한 인재(人災)들이 되풀이된다.

누군가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라고 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전의 나쁜 선례가 다시 등장하는 이유는 인간이 잘 망각하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자글자글 끓다가 식었다가를 반복하면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부침을 반복하는 역사와 관련, 칼 마르크스는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다른 한번은 비극으로’라고 역설했다. 적절한 표현이다. 어쨌거나 냄비 근성이건 가마솥 근성이건 이국종 교수에 대해서는 충분히 끓어도 된다. 그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어떤 선각자의 말대로 ‘자부심·자긍심은 인간이 입을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갑옷’이므로.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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