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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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2-18   |  발행일 2017-12-18 제31면   |  수정 2017-12-18
[월요칼럼]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배재석 논설위원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인 이형기의 ‘낙화’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최근 일본에서는 이 시구처럼 생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려는 한 기업인의 생전 장례식이 열려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건설기계 분야 대기업인 고마쓰제작소의 전 사장인 안자키 사토루씨(80)가 그 주인공이다. 말기암 선고를 받고 항암치료를 포기한 그는 지난 11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지인과 학창시절 친구 등 1천여 명을 초청해 감사의 모임을 열었다. 한 일간지에 조그맣게 실린 초대 광고에는 회비나 조의금은 불필요하며 복장은 평상복이나 캐주얼복으로 와 달라는 당부도 담겼다. 당일 행사장에는 그동안 지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전시됐고, 중앙 스크린에는 안자키 사장이 출연했던 TV 영상이 흘렀다. 그는 휠체어를 타고 참석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마지막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인생의 마지막을 가족·지인과 함께하며 품위 있게 마무리하고 싶은 바람은 모든 인간의 소망이다. 누구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 모리 슈워츠처럼 감동적인 죽음을 바라지만 현실은 사람다운 죽음과는 거리가 멀다. 회복 가능성이 없는데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인공호흡기 등 연명치료에 의지해 기약 없이 생명을 이어가는 환자가 병원마다 넘쳐난다.

사실 전통적인 한국인의 임종 장소는 환자가 살던 자기 집이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마지막을 함께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병원이 일반적인 임종장소로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물론 지금도 자택에서의 임종을 가장 선호하기는 한다.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2014년 성인 1천500명을 조사한 결과 본인이 가장 죽기 원하는 장소로 57.2%가 가정을 꼽았다. 그러나 희망과 달리 실제로 말기환자들이 최후를 보내는 곳은 대부분 병원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분석 결과 2013년 기준 우리나라 연간 사망자 26만8천88명 가운데 71.5%인 19만1천682명이 의료기관에서 숨졌다. 자택에서 사망한 비율은 17.7%에 그쳤다. 문제는 병원 임종이 보편화되면서 환자의 품위 있는 죽음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아직도 국내 대형병원에는 병실과 장례식장만 있고 임종실조차 갖추지 않은 것이 우리 임종문화의 현주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돼 내년 2월부터 본격 시행된다는 점이다. 임종을 앞둔 환자가 연명의료의 시행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어느 정도 품위 있는 죽음, 준비된 죽음이 가능해졌다. 그렇더라도 연명치료 중단을 위한 의학적 법적 장치를 마련한 것일 뿐 죽음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무엇보다 말기환자들이 편안하고 인간답게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호스피스 이용을 활성화하고 인프라를 확충하는 일이 시급하다. 국내에서도 호스피스 이용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으나 여전히 저조하다. 지난해 암 사망자 7만8천194명 중 호스피스 완화의료를 이용한 비율은 17.5%에 지나지 않는다.

자택에서의 임종을 늘리기 위한 가정호스피스 확대도 필요하다. 가정호스피스는 의사·간호사·사회복지사 등이 팀을 이뤄 가정에서도 호스피스 병동에서와 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와 함께 호스피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개선하는 일도 과제다. 단지 호스피스 병동을 죽으러 끌려가는 곳 쯤으로 알거나 호스피스팀을 저승사자처럼 여기는 편견을 바로잡는 일이 중요하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정유년도 어느새 저물고 있다. 새해 해돋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마지막 해넘이가 눈앞에 다가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영부영하는 사이 종착역에 다다른다. 죽음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라고 했다. 라틴어 격언에도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와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라는 말이 있다.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고 지금 살고 있는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뜻이다. 진정한 웰다잉의 의미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새해에는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고 아름다운 날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살기를 빌어 본다.배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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