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통일과 탈원전

  • 김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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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02   |  발행일 2018-01-02 제38면   |  수정 2018-01-02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
남북 통일시대에 대비한
전력수급 계획 반영 안돼
무리한 탈원전 정책 추진
미래 먹거리를 잃을 수도
[화요진단] 통일과 탈원전

#지난해 대선 한 달 뒤쯤인 6월 중순 경주 한수원 본사 홍보관을 다녀왔다. 당시 한수원 직원이 푸념처럼 내뱉은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우리나라 원전의 안전성과 에너지효율성, 건설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새 정부는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이려고 한다. 정부 스스로 경쟁력 있는 미래 먹거리를 없애는 꼴이다. 대놓고 정부 정책을 비판할 처지도 못 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그의 걱정이 기우에 그치지 않고 있다.

#2006년 12월18일 3박4일 일정으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표단과 함께 평양을 방문한 적이 있다. 밤거리는 깜깜했고, 대표단 숙소였던 47층짜리 양각도국제호텔은 객실 외에는 온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나라 중앙도서관 격인 인민학습당도 난방이 안 돼 시민들이 두꺼운 옷을 껴입은 채 책을 보고 있었다. 심지어 병원조차 추웠다. 북한의 심각한 전력난을 실감했다. 그 당시도 북한의 핵실험으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진행되고 있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해 12월29일 향후 15년간(2017~2031)의 전력 수급 전망 및 전력설비 계획을 담은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확정했다. 전체 발전량 중 재생에너지 비중을 현재 7% 선에서 20% 선으로 끌어올리고, 원자력 비중은 30% 선에서 23% 선으로 낮춘다는 것이 골자다. 탈원전을 공식화한 것이다. 신규 원전 6기 건설(울진 신한울 3·4호기, 영덕 천지 1·2호기 등) 중단과 경주 월성 1호기 올해 폐쇄 내용도 포함됐다. 최대 전력 수요는 2년 전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 당시보다 12.7GW나 낮춘 100.5GW로 잡았다.

정부가 이 같은 탈원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간과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통일 후 북한의 전력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지금이야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으로 통일 이야기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통일은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고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부의 전력 수급 계획에는 통일 후 전력 수요는 아예 반영돼 있지 않다. 통일 후 북한 전력 문제는 싫든 좋든 우리 몫일 수밖에 없다. 과연 원전이 아닌 신재생에너지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최대 전력 수요마저 낮춘 터에 발전 효율이 원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신재생에너지로는 통일로 발생할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북한의 발전 설비 총량은 2016년 기준 7천여㎿로 남한의 12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통일 후 북한 전력난을 어느 정도 해소하려면 적어도 원전 4기 발전량의 전기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탈원전 정책은 우리나라 미래 먹거리 산업 하나를 잃게 할 수도 있다. 한전은 지난해 12월6일 영국 무어사이드에 2025년까지 총 3.8GW 용량 3기를 짓는 영국 원전사업(건설비 약 21조원)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됐다. 사우디아라비아, 체코 원전 건설 사업에도 참여를 추진하고 있다. 우리나라 원전 기술과 시공 능력, 운용 능력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이다. 향후 30년간 원전 시장 규모는 600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아직은 원전을 짓고 있어서 해외 원전 사업에 참여가 가능하겠지만, 탈원전 정책으로 국내 원전 건설이 중단돼도 원전 수출이 가능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원자력 기술은 한번 중단하면 산업 기반 붕괴로 이어진다. 원자력은 자동차, 조선, IT와 함께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핵심 전략 산업이다. 정부가 원전 건설보다 해체 산업에 눈을 돌리고 있지만, 해체 산업 역시 건설 기술이 전제돼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최근 지난해 5월 대선 당시 공약했던 원자력 발전의 단계적 축소를 당분간 보류하겠다고 밝혔다. 신재생에너지는 출력이 불안정한 에너지원이어서 원전을 대체할 수 없고, 원전이 탄소 배출에서 자유로운 에너지원이라는 게 그 이유다. 대선 공약이라고 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공약이 현실에 맞지 않다면 파기하는 것이 공약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나을 수도 있다.

국가에너지 정책은 특정 집단의 신념과 단편 지식으로 결정돼서는 안된다. 하루아침에 실행할 문제도 아니다. 전력 수급 기본 계획에는 통일을 전제한 북한 전력 수급 문제도 반영돼야 한다.

김기억 (동부지역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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