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구상詩문학상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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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04   |  발행일 2018-01-04 제31면   |  수정 2018-01-04
[영남타워] 구상詩문학상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1988년 팔순의 구상 시인이 병상에서 남긴 메시지는 짧지만 그 울림은 컸습니다. 당시 외출 중이던 시인은 후진하던 차량에 받혀 다리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이 사고로 합병증이 겹쳤습니다. 그 길로 시인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야 했습니다. 입에는 호흡기가 채워졌습니다. 유일한 의사소통은 필담(筆談)뿐이었습니다. 연필을 쥐어주면 간신히 알아볼 수 있는 글씨로 자신의 생각을 전했습니다.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날이 갈수록 악화됐고, 결국 중환자실로 옮겨야 했습니다. 중환자실로 옮겨지던 그날이었습니다. 시인은 병원 복도에서 펜을 찾았습니다. 가족들은 급한 대로 작은 메모지와 볼펜을 손에 쥐어주었죠. 시인은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메모지에 뭔가를 적었습니다.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펜을 놓은 시인은 이내 혼수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다행히 이후 병세가 나아져 여섯 해를 더 살다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2004년 세상을 뜰 때는 별다른 말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족들은 1998년 그해, 병원 복도에서 남긴 메시지를 구상 시인의 마지막 유언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시인 구상. 현대 한국시단(韓國詩壇)의 거목입니다. ‘삶을 노래하는 구도자’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습니다. 프랑스가 선정한 세계 200대 문인이면서 1999년과 2000년 노벨문학상 본심 후보에 올랐던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시인이었습니다. 그는 시인이면서 필봉을 꺾지 않는 강직한 언론인이었습니다. 영남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역임할 당시에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구상 시인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쓴 ‘세상에는 시가 필요해요’. 이 메시지는 시인이 지금 이 시대에 던진 화두입니다. 시와 문학이 표류하는 세상에 던지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기실 한국 시단의 위기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집을 찾는 독자들은 급격히 줄었습니다. 밀리언셀러 시집이 나왔다는 소식도 끊긴 지 오래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급기야 시인들이 생계를 걱정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먹고살 걱정없이 시를 쓸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시가 필요한 세상’, 세상은 오히려 시에 등을 돌렸습니다. 아쉽고 속 상할 따름입니다.

영남일보가 지난해 말 구상詩문학상을 제정했습니다. 시집 ‘유에서 유’를 펴낸 오은 시인이 첫 수상자로 결정됐습니다. 처음 이 상을 만든다고 할 때 일부에서는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았습니다. ‘문학상 남발’때문입니다. 이름은커녕 주체도 불분명한 문학상이 차고 넘치기는 합니다. 책을 대량으로 구입하는 조건으로 상을 주기도 합니다. 권위는 차치하고 온갖 상거래가 작동하는 비즈니스로 전락한 꼴입니다. 끼리끼리 어울려 집단을 이루고 상을 나눠 갖기도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문학이 타락한 이유를 ‘수많은 문학상과 그 문학상을 운영하는 자들’ 때문이라고 일갈합니다.

영남일보도 구상詩문학상을 제정하면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서울 영등포구와 구상선생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구상문학상이 있기 때문에 더욱 고민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영남일보가 문학상을 제정한 것은 아프고 삭막한 이 시대에는 아직도 시가 필요하다는 공감대 때문입니다. 그것은 구상 시인의 유언이면서 우리 세대가 지켜가야 할 화두입니다. 또 여전히 묵묵히 시를 지키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그들은 ‘시가 무너지면 사랑이 무너지고, 사람이 사라져 미움과 비인간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구상詩문학상이 이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시상식은 오는 12일 오후 5시 영남일보에서 개최됩니다. 시가 필요한 세상. 구상詩문학상이 그런 세상을 여는 창이 되기를 바랍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지지를 부탁드립니다.

백승운 (사회부 특임기자 겸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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