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 교육] 사람을 피하는 선비(人之士)와 세상을 피하는 선비(世之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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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15 07:48  |  수정 2018-01-15 07:48  |  발행일 2018-01-15 제17면

장저(長沮)와 걸익(桀溺)이라는 두 은자가 밭을 갈고 있었다. 공자가 자로를 시켜 두 사람에게 나루터를 묻게 하였다. 자로가 장저에게 나루터가 어딘지 묻자 장저는 공자는 나루터를 이미 알 것이라고 하며 가르쳐주지 않았다. 자로가 다시 걸익에게 물으니 걸익 역시 나루터를 가르쳐주지 않으면서, 천하가 다 어지러울 때는 ‘사람을 피하는 선비(人之士)’를 따르는 것보다는 ‘세상을 피하는 선비(世之士)’를 따르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논어’에는 여러 명의 은자(隱者)들이 나온다. 자로에게 공자를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행하려는 사람(知其不可而爲之者)’이라고 말하는 성문지기 신문(晨門), 공자를 봉황으로 칭하며 위태로운 세상을 경고한 초광접여(楚狂接輿), 공자를 오곡도 분간 못한다고 비판하면서도 자로를 하룻밤 재워 준 하조장인(荷丈人) 등이 모두 은자들이다. 장저와 걸익도 그 한 부류다. 공자는 이런 은자들에게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뜻에는 공감하였다. 그들을 도가 행해지지 않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자신과 지향하는 뜻이 같은 현자(賢者)로 본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헌문’편에서 “현자는 세상을 피하고(避世), 그 다음은 장소를 피하고(避地), 그 다음은 여색을 피하고(避色), 그 다음은 나쁜 말을 피한다(言)”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걸익은 왜 공자를 ‘사람을 피하는 선비’라고 했을까?

‘자한(子罕)’편에는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여기 아름다운 옥이 있다면 궤 속에 감추어 두시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상인을 구해서 파시겠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공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팔아야지! 팔아야지! 나는 값을 기다리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했다. 이처럼 공자는 강렬하게 세상에 나아가 자신의 도를 펼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자신에 대한 대접이 조금만 소홀하면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떠나곤 하였다. 이는 유하혜(柳下惠)가 작은 벼슬에서 여러 번 내침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떠나지 않은 것과 대비된다. 아마 걸익은 유하혜와 비교하여 공자를 ‘사람을 피하는 선비’라고 지칭했을 것이다.

장자는 사람이면 누구나 갖추고 있는 덕을 동덕(同德)이라고 하였다. 추우면 옷을 입고,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과 같은 것이 동덕이다. 장자는 동덕이 이루어진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새나 짐승과 함께 살고(同與禽獸居), 다 같이 무지하여 그 덕이 떠나지 않고(同乎無知 其德不離), 다 같이 욕심이 없어(同乎無慾) 이를 소박(素朴)함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장저와 걸익이 추구하는 이상사회일 것이다. 반면 장자는 유가가 지향하는 사회를 웅덩이가 말라 물고기가 서로의 거품으로 상대방을 적셔주는 것과 같다고 보았다. 즉 유가에서 말하는 인(仁)이라고 하는 것이 좁은 웅덩이에서 축축한 숨으로 적셔주고(相以濕) 거품으로 적셔주는(相濡以沫) 것과 같다고 하면서, 그보다는 넓은 강이나 호수에서 여유롭게 헤엄을 치며 서로를 잊고 지내는 것이 낫다고 하였던 것이다.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두 가지 사회공학(social engineering)이 있다고 하였다. 한 가지는 최상의 사회를 상정하고 그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최악의 사회를 상정하고 그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다. 포퍼는 자유민주주의는 후자의 사회공학이며 비록 자유민주주의를 통해 이상적인 사회에 도달하는 속도는 늦더라도 그것이 자신이 직접 경험한 최악의 사회, 즉 나치즘과 파시즘, 그리고 볼셰비키즘을 극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였다.

유가의 가장 큰 장점은 그 출발점이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도가나 불교는 기하학적인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고 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강구하는 데 반해, 유가는 복닥거리는 이 현실에 발을 딛고 있지만 머리를 들어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다. 소위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이 그것이다.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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