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오 인장 이야기 .3] 국경의 밤, 열폭 묵화병풍에‘靑篆(청전)’‘徐薰之印(서훈지인)’인장을 찍다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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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17 08:04  |  수정 2018-01-26 11:36  |  발행일 2018-01-17 제23면
독립운동가 허위 숨겨준 뒤 관직사임
중국으로 건너가 청전·서훈 이름 사용
도움준 여관주인에 인장찍어 병풍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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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靑篆)’과 ‘서훈지인(徐薰之印)’ 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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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지인(徐薰之印)’과 ‘석재(石齋)’ 인장을 사용한 1911년 겨울 작품.

서병오는 아호 ‘석재(石齋)’를 비롯해 ‘석재거사(石齋居士)’ ‘석옹(石翁)’ ‘석과(石果)’ ‘죽서도인(竹書道人)’ 등을 사용했는데, 한때 ‘청전(靑篆)’이라는 호를 쓴 적이 있다. 이 호와 함께 ‘서훈(徐薰)’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특별한 이유와 상황에서 사용한 이 아호와 이름을 새긴 인장들이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가 기증받은 인장에 함께 들어 있어 눈길을 끈다. ‘서훈’은 서병오의 어릴 적 스승인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피해 중국 주유 때 사용한 인장 ‘청전(靑篆)’ ‘서훈지인(徐薰之印)’

서병오는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허훈이 별세하자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훈’ 자를 가져와 서훈이라는 이름을 지어 사용하고, 또한 청전이라는 호를 지어 함께 사용한 듯하다. 서병오는 허훈의 문하에서 어린 시절(13세 때부터) 유학 공부를 했다.

서병오는 1908년 8월에 신령군수로 부임했으나 얼마 후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그해 겨울에 제자 긍석 김진만과 함께 급히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떠난다. 한국독립운동사 자료에 따르면, 이는 서병오가 유학 스승인 허훈의 동생으로 자신과 의교(義交)를 맺은 허위(1854~1908)를 1908년 3월경 자신의 집에 숨겨준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사를 받아야 할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허위와 관련된 일로 석재가 상해로 건너갔다는 소문이 있음을 보고한 내용도 자료에 나온다.

석재는 당시 일제의 눈을 피해 중국으로 건너갈 때 서병오라는 이름 대신 ‘서훈’이라는 가명과 함께 ‘청전(靑篆)’이라는 아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의 작품을 보면 이 가명과 아호를 남기고 있다. 그는 1911년에 귀국한다.

‘내가 무신년(1908년) 겨울에 친구 긍석과 함께 중국 연경에 가게 되었다. 압록강을 건너는데 날씨가 살을 에는 듯 몹시 추웠다. 북쪽은 더욱 심해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기에 안동현(安東縣)의 한인(韓人) 여관에 숙박했다. 여관 주인은 김택준(金宅俊)이었다. 나에게 중국 유람에 대해 두루 이야기해 주었는데 정분이 마치 오래된 친구를 대하듯이 하였다. 그래서 섣달을 전후해 3개월 머물렀는데 나를 위해 주선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마음이 흡족했다. 이제 여장을 갖춰 떠나게 되니 슬픈 마음을 누를 길이 없다. 이에 열 폭 묵화를 그렸으니 부족하나마 후일의 증표로 삼고자 한다. 공께서 나무라지 않고 헤어진 후에도 칭찬해 준다면 매우 다행이겠다. 청전(靑篆) 서훈(徐薰)이 등불의 심지를 잘라가며 팔을 시험한다. 기유년(1909년) 봄 정월 보름(上元).’

서병오가 1908년 겨울 2차 중국 주유를 위해 국경을 넘는 여정에 머문 한인 여관을 떠나면서 고마운 마음에 선물한 열 폭 병풍 작품 중 마지막 폭의 화제 글 내용이다.

이 작품을 보면 ‘청전(靑篆)’이라는 관서(款書· 작가의 호나 이름)를 쓰고, ‘청전(靑篆)’과 ‘서훈지인(徐薰之印)’이라는 인장을 사용했다. 다섯째 폭에는 ‘청전거사(靑篆居士)’라는 관서를 쓰기도 했다.

◆1909~1911년 작품에 사용한 인장인 듯

이번에 기증받은 관련 인장은 ‘청전(靑篆)’ 한 개와 ‘서훈지인(徐薰之印)’ 두 개다. ‘서훈지인’ 인장 두 개 중 하나는 한 변이 2.7㎝, 다른 하나는 1.2㎝ 되는 사각형 인장이다. ‘청전’ 인장은 한 변이 2.2㎝인 사각 인장이다.

위의 작품에 사용된 인장은 ‘청전(靑篆)’과 ‘서훈지인(徐薰之印)’ 중 큰 인장이다. 이런 역사적 의미가 있는 인장이라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청전’이라는 아호인은 많이 사용하지 않은 듯하다. 이 작품 말고는 그 예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서훈지인’을 사용한 작품 중 연도를 표기한 것으로 위의 작품 말고 묵란 작품 ‘노근란’과 해서작품 ‘토상연족(土牀煙簇)’에 ‘경술(庚戌)’이라는 표기가 있어 1910년 작임을 알 수 있고, 주전자와 화분의 꽃을 그린 작품에는 ‘신해계동(申亥季冬)’이라는 표기가 있어 1911년 겨울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는 대부분 ‘서훈지인’을 사용해도 연도를 표기하지 않고 있으나, 1909~1911년에 휘호한 서병오의 작품으로 연구자들은 보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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