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12] 봉화 춘양구곡(下)...높고 깊은 ‘창애’는 선비를 품고…들판 여는 ‘한수정’엔 선현의 자취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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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1-18 07:55  |  수정 2021-07-06 15:02  |  발행일 2018-01-18 제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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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양구곡 중 5곡 창애정(위쪽)과 8곡 한수정. 춘양구곡은 앞선 선비들의 유적을 중심으로 설정되었다.

3곡은 풍대(風臺)다. 2곡 사미정에서 도로를 따라 600m 정도 상류로 올라가면, 냇가에 자리한 10m 높이의 큰 바위가 보인다. 풍대다. ‘어풍대(御風臺)’라고도 불렀다. 이곳에는 풍대 홍석범이 학문을 닦으며 제자를 가르치던 어풍대가 있었지만 이한응 당시에 이미 없었다. 이한응은 3곡시와 관련해 ‘홍풍대가 창건한 정사는 훼손된 지 오래다. 바위 봉우리가 매우 기이하다’고 적고 있다.

‘삼곡이라 풍대는 배를 얹어놓은 듯(三曲風帶架若船)/ 신선이 배를 잘못 몰아 찾게 된 지 몇 년이나 되었나(冷然神御枉何年)/ 시내는 끊임없이 흐르고 바위 언덕 영원한데(波流不盡巖阿古)/ 우는 새 지는 꽃들 모두 가련하여라(啼鳥落花摠可憐)’

이 시의 ‘가약선(架若船)’은 주자의 ‘무이도가’ 중 3곡시에 나오는 ‘가학선(架壑船)’을 떠올리게 한다. 가학선은 중국 고대 고월인(古越人)들이 시체를 안장하던 관이다. 이 목관은 깎아지른 높은 절벽에 안치했는데 지금도 무이산에 가면 볼 수 있다.


5곡 창애정
냇가 바위 벼랑 맞은편에 지어
정면 4칸 측면 3칸 춘양목 정자
이중광 은거하며 선비들과 풍류

8곡 한수정
1608년 지은 춘양 의양리 정자
권벌이 세운 거연헌 있던 자리
소실 후 손자 권래가 다시 지어



이 풍대 근처에는 조덕린의 제자 옥계(玉溪) 김명흠(1696~1773)을 기리기 위해 지은 옥계정(玉溪亭)이 있다. 졸천정사(拙川精舍)라고도 한다. 옥계정 뒤에는 옥계고택이 자리하고 있다.

4곡은 풍대에서 80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나타나는 바위 벼랑 앞의 소(沼)인 연지(硯池)다.

‘사곡이라 연지에 바위 비치니(四曲硯池印石巖)/ 갈매기 맹세와 물고기 즐거움 매일 좋구나(鷗盟魚樂日)/ 마치 청련거사의 시 구절 베껴 쓰듯(若敎依寫靑蓮句)/ 도도한 물결 지금도 못을 가득 채우네(滔滔如今自滿潭)’

갈매기 맹세는 은거를 다짐한 마음을 비유한다. 이한응은 4곡에서 천리(天理)가 유행하는 자연의 이치를 깨달아 노래하고 있다. 청련(靑蓮)은 당나라 시인 이백을 말한다.

◆5곡 창애정은 이중광 은거하던 곳

5곡은 냇가에 우뚝 솟은 바위 벼랑 창애(蒼崖)다. 연지에서 1㎞ 정도 떨어져 있다. 창애 벼랑에는 유려한 필치의 한자 ‘수운동(水雲洞)’이 새겨져 있다.

창애 맞은편 밭 가운데 창애정(蒼崖亭)이 자리하고 있다. 창애 이중광(1709~1778)이 은거하며 당대의 선비들과 풍류를 즐기고 제자를 가르치던 정자로, 춘양목을 사용해 지었다.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ㄱ자형 기와집이다. 창애정에 걸린 시판 ‘창애정’의 내용이다.

‘한없는 청산 속에 자유롭게 놀던 몸이(無限靑山自在身)/ 어이해 오릉의 손님이 되었던가(如何來作五陵賓)/ 내일 아침 말 타고 청산에 돌아가면(明朝騎馬靑山去)/ 여전히 청산속 사람 되려하네(依舊靑山影菓人)’

이한응은 창애의 풍광을 보며 5곡시를 읊었다.

‘오곡이라 창애는 높고 깊어서(五曲滄崖高且深)/ 병풍으로 가리듯 운림을 숨겼네(由來屛隱鎖雲林)/ 창애 그림자 속 사람은 어디 갔는가(依然影裏人何處)/ 홀로 선 청산 변함없는 마음일세(獨立靑山萬古心)’

6곡은 쌍호(雙湖)다. 봉화군 춘양면 소로리 방전마을에 있다. 명칭이 두 개의 소가 있다는 뜻이지만,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옛날에는 물길이 두 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냇가 한쪽에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 독산(獨山)이다. 독봉(獨峰), 고봉(孤峰) 등으로 불리는 바위 산이다. 이한응은 6곡시 설명에서 ‘봉우리의 옛 이름은 삼척봉이다. 나의 벗 홍치기가 여기를 차지하고 쌍호정을 지었다’고 적고 있다. 삼척봉이라 한 것은 삼척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독산 아래에는 임진왜란 때 군량미를 확보하는데 큰 공을 세운 봉계(鳳溪) 홍세공(1541~1598)을 모신 사당인 당성사(唐城祠) 등 남양홍씨 유적들이 있다.

‘육곡이라 두 시내가 바위 물굽이를 감돌고(六曲雙溪繞石灣)/ 외로운 봉우리 가운데 솟아 관문이 되었네(孤峰中突作中關)/ 상전벽해 오랜 세월 원래 그러하니(桑瀛浩劫元如許)/ 이 동천 안의 별천지 절로 한가롭네(壺裏乾坤自在閑)’

시를 보면 운곡천 물굽이가 독산 양쪽으로 빙 둘렀음을 알 수 있다. 독산이 관문이 되었다는 것은 여러 갈래 길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7곡은 서담이다. 이한응은 7곡시 주석에 ‘이 굽이는 옛날 서당의 터가 되니 이로 인해 못의 이름을 삼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서당 터도 확인할 수 없다.

‘칠곡이라 서담 물은 여울로 흘러들고(七曲書潭注入灘)/ 붉은 절벽 푸른 빛 머금어 달리 보이네(丹崖涵碧更殊看)/ 선을 생각하던 당시의 즐거움 안타깝구나(憐觀善當時樂)/ 성색이 부질없이 맑고 학의 꿈 차갑네(聲色空淸鶴夢寒)’

◆권벌의 얼이 서린 8곡 한수정

8곡 한수정(寒水亭)은 춘양면 의양리에 있다. 한수정은 1608년에 세워진 정자다. 원래 이 자리에는 충재 권벌(1478~1548)이 세운 거연헌(居然軒)이라는 정자가 있던 자리로, 그 정자가 소실된 후 권벌의 손자인 권래가 다시 세웠다. 연못과 대, 고목들이 잘 어우러진 정자다. 권벌은 강직한 선비로 이름을 떨치며 유배지에서 생을 마친 문신으로,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불천위에 오른 영남의 대표적 선비다.

이한응은 ‘정자는 한수정이라 부르고 헌은 추월헌이라 부르고, 대는 초연대라고 하였다. 또 연못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한응은 이곳에서 선현 권벌을 떠올리며 이렇게 노래한다.

‘팔곡이라 한수정은 넓은 들판이 열리는 곳(八曲寒亭弟野開)/ 선계의 초연대가 문득 맑은 물굽이 굽어보네(仙臺超忽俯澄)/ 사람들아 선현의 자취 멀어졌다 한탄 말게(遊人莫歎遺芳遠)/ 가을달 밤마다 연못 속으로 찾아온다네(秋月潭心夜夜來)’

한수정에서 운곡천을 90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9곡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이른다. 도연서원은 정구(1543~1620)와 허목(1595~1682), 채제공(1720~1799)을 기리던 곳이었는데 1858년에 훼철되었다.

지금 그 자리에는 두 개의 삼층석탑이 서 있다. 봉화서동리삼층석탑(보물)이다. 이곳은 신라 고찰이던 남화사(覽華寺) 터로 알려져 있다. 절터에 서원이 들어섰고, 지금은 춘양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도연은 도가 비롯되는 연못이라 의미다.

‘구곡이라 도연서원 호연한 기상 있구나(九曲道淵更浩然)/ 봄날 누대에서 아득히 긴 시내를 굽어보네(春樓遞見長川)/ 서원은 여전히 궁궐의 담장처럼 남아 있고(依舊賴有宮墻在)/ 십리 풍연은 거울 속 하늘 같네(十里風烟鏡裏天)’

춘루(春樓)는 서원에 있던 청풍루이고 장천은 운곡천을 말한다. 청풍루에 올라 서원 앞을 돌아 흘러가는 운곡천을 바라보며 도가 멀리 영원히 흘러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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