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채용관리위원회’

  • 조정래
  • |
  • 입력 2018-02-09   |  발행일 2018-02-09 제23면   |  수정 2018-02-09
[조정래 칼럼] ‘채용관리위원회’

‘이게 나라냐’는 아우성이 귀청을 뚫고, 촛불의 일렁임이 망막을 뒤덮을 법하다. 공공기관은 물론 민간기업까지 만연한 채용비리가 온 국민을 분노의 화염에 휩싸이게 한다. 아버지가 면접관으로 자녀의 면접을 보았다면 결과는 너무나 당연한 해피 엔딩이었을 터. 강원랜드 수사 과정에선 검찰 고위층에 의한 축소와 은폐, 그리고 외압 의혹마저 불거졌다. 강원랜드는 채용비리에 연루된 직원 239명을 업무에서 배제시키고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채용비리의 백태가 우리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고, 그 후폭풍은 우리 사회 전 분야를 강타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채용비리공화국이다.

처방전이 쏟아지고 있다. 사전 예방책인 블라인드 채용에서부터 신고포상금제 운영 등 사후 대책까지. 채용비리는 피해자를 특정하기 어렵고 피해를 회복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미연의 방지책이 중요하다. 정부에서 내놓는 채용비리 대책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이자 뒷북에 불과하다. 백약이 무효할 정도라면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접근으로는 해법이 나올 수 없다. 채용의 관행에 대한 숙고와 고찰, 기준의 새로운 설정이 전제되고 이를 통한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져야 한다. 블라인드 채용과는 달리 과거에는 입사지원서에 친인척 관계에 있는 고위 공무원과 정치인을 명기하도록 한 난도 있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이러한 관행이 왜 이제야 비리로 받아들여지게 됐는지 회고적 고찰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가장 우선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환부는 채용비리에 대한 불감증의 만연이다. 금융당국의 채용비리 검사 결과에 맞서는 은행들의 자세와 태도는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한마디로 ‘경영행위’이고 ‘재량의 영역’인데 뭐가 문제냐는 항변이다. 검찰 수사에서 자초지종이 밝혀지겠지만 미리 공고한 적이 없는, 이를테면 특정대학 출신 우대와 ‘VIP 리스트’ 관리 등과 같은 기준과 절차가 임의적으로 적용됐다면 어느 누가 수긍할 수 있겠는가. 은행권의 반발은 채용비리 범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확인해준다. ‘으레 그러려니’ 해온 민초들 역시 이러한 불감증의 공범이다. 채용비리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우선이다.

제도적인 혁신이 필요하고, 채용 관리가 후진적이라면 우리 사회의 선진적인 분야를 혁신 모델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최근 들어 선진국 수준에 도달한 선거법과 선거관리는 성공 사례로 꼽을 만하다. 기실 공명선거는 정착된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만 해도 투표소 입구에서는 막걸리 판이 벌어지곤 했다. 통장과 반장 등이 여당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한 잔 마시고 투표하시라’며 집권당 후보 지지를 독려했다. 야당측 인사가 아니면 그냥 보고 넘기던 선거풍경이었다. 지금이라면 어떨까. 당장 감옥에 가야 하고 집권당 후보는 역풍을 맞아 낙마할 게 틀림없다.

격세지감이 말할 수 없이 크지만 이러한 관권선거는 과거 우리나라 선거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고무신 선거’였고 어마어마한 금권선거였다. ‘아버지가 당선되면 나라가 망하고 떨어지면 집안이 망한다’는 후보자 아들의 푸념이 회자되곤 했다. 돈과 관권이 묶인 지금 우리의 선거는 과거에 비하면 얼마나 공명한가. 엄격한 선거법과 선관위의 기여 덕분이다. 이제 선거법은 무섭다. ‘돈은 묶고 발은 푼다’는 기본 정신 또한 공명하다. 법 적용은 엄정하다. 낙선하더라도 불법에 대해서는 죄를 묻는다. 관용은 출마를 포기하면 정상 참작이 되는 정도. 법 준수는 기본으로 정착됐다. 선거법에 저촉되는지 여부에 대한 문의는 일상화됐다. 선거법이 생활 속에 자리잡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됐음은 물론이다.

채용의 투명성과 공정성 확보도 이처럼 선거법 정착의 시행착오를 거칠 게 틀림없다. 선거법 위반의 기준이 달라진 만큼 과거 관행으로 여겨졌던 ‘경영상 전략 채용’ ‘재량 채용’조차 이제 비리와 불법으로 단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공평·공정하고 정의로운 채용에 기여하는 ‘채용법’과 ‘채용관리위원회’를 두면 어떨까. 한국당이 비판하는 사회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발상이긴 하지만 사회 혁신과 선진화를 위한다면 ‘자유’의 일부 희생도 불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논설실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