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올 설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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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15   |  발행일 2018-02-15 제26면   |  수정 2018-02-15
즐겁고 신나게 설 맞이하고
편안하게 떡국을 비우면서
한살씩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수고 때문이란 걸
그때는 몰랐었다
[여성칼럼] 올 설날에는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설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이 동요에 따르면 내일이 우리 설이니 오늘은 까치설인 셈이다. 어릴 적만 해도 설날 준비로 몇날 며칠이 분주했던 것 같다. 대종가(大宗家)는 아니지만 큰집 종부인 어머니는 한 달 전부터 집안 대청소를 하고 설을 쇠러 오는 친척들이 편히 묵을 수 있도록 이불과 요 홑청을 따서 빨고 다듬질해서 다시 꾸며놓는 일로부터 설맞이 준비를 시작했다. 설이 좀 더 임박해지면 어머니는 차례상을 위해 큰 장을 며칠씩 봐야 했고 열댓 명 대식구가 먹을 밑반찬이며 음식 장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

지금처럼 쉽게 떡국떡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불린 쌀을 방앗간에 가져다 가래떡을 뽑아 와야 했고, 가래떡이 꾸덕꾸덕 말라 썰기 좋은 상태가 되면 저녁상을 물리고 할머니와 어머니, 어린 나까지 여자 삼대(三代)가 말려 놓은 가래떡을 어슷어슷하게 썰어 떡국떡을 장만했다. 필자야 과도 들고 소꿉장난하는 수준이었지만 말이다. 마실 거리도 아이들 감주에 어른용 식혜·수정과까지 집에서 한 솥씩 만들었으니 그 품이 얼마나 들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설 전날 낮엔 여자들이 하루 종일 서서 전 굽고 차례음식 만드느라 고생하고도 밤에는 할머니를 위시해 큰집인 우리 집, 서울에서 내려온 작은집, 막내집의 온 가족들이 모여 손 만두를 빚어 먹곤 했다. 섣달 그믐날 밤은 잠을 자지 않고 새우다 보니 처음엔 출출한 속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겠지만 어느새 새해로 넘어가는 자정이 되면 물을 올리고 만두를 삶아 온 가족이 둘러 앉아 먹는 것이 우리 집만의 가풍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설을 쇠고 친척들이 각자의 집으로 떠나도 어머니의 일은 바로 줄어들지 않았다. 며칠이라도 사람이 깔고 덮었던 이불과 요를 묵혀 두면 냄새가 나기 때문에 다시 홑청을 따서 빨아야 했고, 어질러진 집안을 청소하고 정리해야 했다. 명절 동안 쌓인 산더미 빨랫감도 빨아 널어야 했고, 설거지는 누군가 했더라도 밖으로 나와 있는 제기와 그릇들을 다시 제자리로 치우는 것은 어머니의 몫이었다.

이제는 설날 풍경도 많이 바뀌었다. 아버지도 안 계시고 할머니 자리를 연로하신 어머니가 대신하고 있지만 설이라고 큰집에 와서 며칠씩 묵고 가질 않으니 이불홑청 갈 일도 없고, 말린 가래떡을 손에 물집이 잡히도록 썰 일도 없으며, 같이 밤을 새우지 않으니 섣달 그믐날 잠들면 눈썹이 센다며 어린 조카들 골탕 먹일 일도 없어졌다. 우리 집 그믐날 풍경이던 만두 빚어 자정에 먹던 풍습도 당연히 사라졌다. 며칠 전 가족 식사 자리에서 오빠가 “올 설엔 다 같이 모여 만두를 빚어 먹어볼까? 난 예전 그믐날 먹던 만두 맛이 잊히질 않아. 그때 엄마가 만두를 정말 잘하셨는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어머니는 조용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만두는 사다 먹자. 여자들 힘들게 하지 말고.” 올케들도 물론 반대였다. 난 어머니가 당시 설 준비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만두는 다 같이 빚었지만 만두소는 어머니가 갖가지 재료를 다지고 양념해서 준비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때는 몰랐었다. 우리가 즐겁고 신나게 설날을 맞이하고 편안하게 떡국을 비우면서 한 살씩 먹을 수 있었던 것이 매년 설마다 누군가의 독박 가사와 수고로움에 전적으로 기댄 덕분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옛날 대가족이 모여 함께 지내던 설 풍경을 낭만적으로 회상하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 여자들은 얼마나 편해졌는지 차례음식을 사다가 차리는 집도 있다며 힐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세상이 좋아지고 편해졌다 해도 남성과 여성을, 아들과 며느리를 달리 대접하고 같은 여성이라도 딸과 며느리를 다르게 대하는 이중적 잣대는 여전한 것이 현실이다. 이번 설날은 아들, 딸, 며느리 구분 없이 평등한 설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만두는 먹고 싶은 사람이 장만해서 먹는 걸로. 정일선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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