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좋은 작가와 좋은 어른

의외였다. 솔직히 좀 놀랐다. 패기만만한 40대 초반 미술가의 말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최근 대구 봉산문화회관 유리상자에 작품을 전시 중인 홍정욱 작가와 전화로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그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했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전화를 했는데, 뜻밖의 ‘인간적인 다짐’을 들은 셈이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에 그는 “좋은 작가보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고 담담히 털어놨다. “좋은 작가는 부차적인 것이다. 좋은 작가라는 타이틀을 내려놨다”는 말까지 했다. 그는 1976년생이다. 한창 작품에 욕심을 낼 나이다. 또 작가라면 누구나 좋은 작품으로 이름을 얻고 싶은 욕망이 있다.

‘좋은 작가와 좋은 작품을 포기하겠다고?’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좋은 작가를 포기하면서까지 왜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지를. 그는 “지금 사회를 보니 어른스러움이 필요한 것 같다”고 했다. 사회와 가정, 자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말이다. 그는 홍익대 미대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대학 시절 내가 싫어한 교수의 모습이 있었는데, 교수가 된 지금 제자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좋은 어른되기’를 실천하는 중이다.

홍정욱 작가와 대화하면서 ‘En 시인 파문’이 떠올랐다. 최근 문학계를 강타하고 있는 원로시인의 성추행 논란이다. En 시인은 한국문단의 거목으로 꼽히는 고은 시인(1933년생)으로 추정된다. 최영미 시인이 황해문화에 발표한 시(詩) ‘괴물’로 촉발된 사건이다. 나이로만 보면 En 시인은 홍정욱 작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른이다. 그런데 En 시인을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최 시인의 시에 적힌 대로 ‘동생에게 빌린 실크 정장 상의를 구기고’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사람을 어른 대접할 수 있을까.

예술인이면 그런 추행이 허용될 수 있는냐의 문제도 있다. En 시인처럼 나이상으로 어른으로 분류될 수 있는 문학과 지성사의 대표인 김병익 평론가(1938년생)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뛰어난 예술가들의 업적은 존중하되 그들의 약점이나 실수는 보호하는 사회적 미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술에서 도덕적 청렴함이 반드시 플러스가 되는 건 아니다. 뛰어난 예술가들은 스스로의 약점, 욕망, 좌절같은 것 때문에 예술이 오히려 깊어질 수 있다. 잘못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깊게 하고,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사례를 뛰어난 예술가들에게서 많이 본다”고 했다. 동의하기 어렵다. 위대한 예술가의 범죄행위는 눈 감아줘도 된다는 말인가. 성추행은 범죄행위일 뿐이다.

물론 예술성과 도덕성은 별개라는 주장도 많다. 인간성은 ‘개판’인데, 작품이 좋은 작가들도 분명 있다. 다만, 비판받는 일부 예술가들의 도덕성이 다른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 범죄에 이르는 행위를 뜻하지는 않는다. En 시인의 행태를 단순히 약점이나 실수로 말할 게 아니다.

홍정욱 작가의 ‘좋은 어른’은 음미할 만하다. 예술을 들먹이며 En 시인의 범죄행위를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사람들은 어른이 아니라 ‘꼰대’다. 꼰대들은 자기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권력을 갖고 있는 꼰대들의 잘못된 행위는 ‘갑질’이 된다. 기득권을 방어하려는 모습으로도 비쳐진다. 모든 예술가가 홍정욱 작가의 생각과 같을 수 없지만, 꼰대가 돼서는 곤란하다. 꼰대가 된 예술가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돼지발정제’ 논란을 일으킨 정치인과 다를 바 없다.

그나저나 예술가들에게 한번 묻고 싶기도 하다. ‘예술이 먼저입니까, 인간이 먼저입니까.’

조진범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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