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프레임 전쟁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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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19   |  발행일 2018-02-19 제31면   |  수정 2018-02-19
[월요칼럼] 프레임 전쟁
허석윤 논설위원

2001년 미국의 43대 대통령에 취임한 조지 부시는 도널드 트럼프 못지않은 감세론자였다. 그는 자신의 대선 공약이던 상속세 폐지를 위해 임기 초부터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반발 여론이 드세 쉽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더구나 워런 버핏을 비롯한 미국의 갑부들이 앞장서 상속세 폐지 반대 운동을 펼치는 바람에 여론은 부시에게 더욱 불리하게 돌아갔다. 하지만 2003년 부시에게 반전의 돌파구를 열어준 구원자가 있었다. 선거 전략가이자 정치 선전가로 유명한 프랭크 룬츠였다. 그는 부시 행정부에 상속세를 ‘사망세’로 바꿔 부르라고 훈수를 뒀다. 미국 국민에게 죽으면서까지 세금을 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 세금 이름만 바꿨을 뿐인데, 이게 먹혔다. 상속세는 수백만 달러 이상의 자산가에게만 부과되지만, 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서민층까지 거부감을 갖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부시 행정부는 우호적으로 바뀐 여론에 힘입어 상속세 폐지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킬 수 있었다.

룬트는 보수우익의 입장에서 정치와 대중의 속성을 나름대로 간파했다. 그는 개인 삶의 80%가 이성이 아닌 감성에 의해 좌우된다고 봤다. 군중심리까지 작용하는 대중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을 터. 그래서 어떤 정치나 정책도 본질보다는 포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지론에 입각해 사망세 외에도 다수의 히트작을 남겼다. ‘지구온난화’를 대체한 ‘기후변화’라는 용어도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룬츠는 소위 ‘오웰식 어법’의 대가라고 할만하다. 오웰식 어법이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서 유래된 것으로, 사안의 본질을 흐리거나 정반대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표현법이다. 주로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정책의 약점이나 불리함을 감추는 이중화법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불경기를 마이너스 성장으로, 가격 인상을 가격 현실화라고 둘러대는 식이다. 물론 국내에서도 이와 비슷한 정치공학적 말장난이 난무한다. 우리가 지겹도록 들었던 세금폭탄, 녹색성장, 4대강 살리기, 종북좌파 따위의 말도 그 중 일부다.

오웰식 어법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언어 자체가 ‘프레임’을 만들기 때문이다. 프레임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특정 현상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뜻한다. 간단히 말해 ‘규정 짓기’나 ‘틀에 맞춰 보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프레임과 관련해 인지언어학의 창시자인 조지 레이코프의 통찰이 단연 돋보인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로도 유명한 그는 언어에 토대를 둔 프레임의 왜곡과 역설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예리하게 짚어낸다. 그 핵심은 상대방이 짜놓은 프레임의 덫에 걸려들지 않으려면 상대방의 언어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나는 MB 아바타가 절대 아니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정치의 본질은 거대한 프레임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인이 궁금한 건 당신의 의견이 아니라 당신의 머릿속에 있는 프레임’이라는 지적은 정확하다. 진보와 보수의 양 극단에 있는 일부를 제외한 일반 대중의 정치적 의견이란 게 정치세력이 선전하는 프레임에 따라 변하기 십상 아니던가. 당연한 일이지만 정치권의 프레임 대결은 선거를 앞두고 가장 불꽃을 튀긴다. 특히 오는 6월 지방선거는 ‘개헌’이라는 초대형 이슈까지 있기에 여야간 프레임 전쟁이 더욱 치열할 수밖에 없다.

알다시피 개헌을 주도하는 쪽은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이다. ‘국민개헌’ ‘지방분권 개헌’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6월 지방선거때 개헌을 성사시킨다는 목표다. 이에 수세에 몰린 자유한국당은 ‘사회주의 개헌’으로 몰아붙이며 6월 개헌 절대불가를 외치고 있다. 하지만 구태의연한 색깔론 프레임은 이제 씨알도 안 먹힌다. 되레 대다수 국민의 눈에는 반(反) 개헌 책동으로 보일 뿐이다. 한국당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지방분권 개헌의 발목을 잡는 세력이란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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