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민주주의와 사법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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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21   |  발행일 2018-02-21 제31면   |  수정 2018-02-21
[영남시론] 민주주의와 사법개혁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민주주의 사회는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란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다만 다수의 뜻이 정당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 뜻이 관철되는 과정은 반드시 법에 따라야 하고, 자신들의 의사가 배제된 소수자를 배려할 수 있는 장치가 있어야 한다. 사실 다수의 뜻이란 것도 돈과 권력으로 얼마든지 조작·왜곡할 수 있기 때문에, 법의 통제 없는 다수의 뜻은 자칫 한 사회의 소수자나 사회적 약자에게는 무지막지한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유권자 다수의 선택에 의해 선출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이 되고 수인의 신분으로까지 전락하게 된 것도 법이 인정하지 않는 권력을 마구잡이 휘둘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은 통치의 수단이기도 하지만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자들을 보호하는 기능도 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법부의 존재 이유이며 법관이 숙명으로 받아들여야 할 역할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 현대사에서 사법부의 독립과 판사들의 소신판결을 가능케 했던 1987년 체제에 무임승차했던 판사들은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특권을 누리면서도 판결만큼은 루소의 시대로 퇴행해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부여해 자연적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버리고, ‘소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고정시켜 교활한 횡령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킴으로써 우리 사회를 재벌들의 영구집권체제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준 정형식 판사는 국민들의 분노가 들끓자 ‘판결로만 말한다’는 판사의 신분으로 인터뷰를 한다. 현직 판사가 일간지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판결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는 것도 ‘참!’ 낯선 광경이지만, 거기서 내뱉은 말은 심신미약자들의 주정만큼이나 어처구니가 없다. 돈의 힘으로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거미줄 같은 영향을 뻗치고 있는 삼성 그룹의 총수를 정 판사는 “어느 기업인이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겠느냐”면서 권력의 핍박을 받는 가련한 신세로 둔갑시켜 버린다. 시장판 건달들에게 ‘삥’을 뜯기는 노점상들도 업권 보호라는 기대는 가지는데, 재벌 총수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뒷골목의 깡패들에게 주머니 털리듯 수십 수백 억원을 5년짜리 비정규직에 불과한 대통령에게 갖다 바쳤을까? 재벌에 대한 이런 연민은 정형식 판사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 롯데 신동빈 회장을 뇌물혐의로 법정구속시킨 판사 역시 “국가 최고권력자인 대통령의 요구를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불쌍한 처지의 재벌총수를 구속시킬 수밖에 없는 자신의 판결에 대한 안타까움을 절절히 드러내고 있다.

재벌총수들의 수준이 정녕 그 지경이라면 격무와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승진과 보직에 온 인생을 걸다시피 하는 판사들의 처신은 어떤 꼴일까? 과연 어느 판사가 승진의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는 청와대의 요구를 함부로 거절할 수 있겠는가? 어느 판사가 얼마 전까지 상사로 모셨던 전관의 부탁을 무시할 수 있겠으며, 고액의 연봉을 제시하며 자문변호사로 영입하려는 대기업의 부름에 냉담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의심은 사법부에 대한 막연한 불신이 아니라 국민 다수가 가지는 ‘합리적 의심’임을 판사들만 모르고 있다.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신분보장이 필요한 이유는 판결에 대한 국민의 비판을 잠재우거나 판사가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법대에 앉아 계속 썩은 법봉을 휘두를 수 있는 특권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대법원은 성범죄를 저지른 판사에게 정직 1개월의 처분을 내려놓고서는 ‘중징계!’했다고 호들갑을 떤다. 군부독재시대에 소신을 지키는 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관의 신분보장제도는 이제 유효기간이 지났다. 이 시대의 판사들은 독재권력으로부터 핍박받는 신세가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의 상식과 법감정을 짓밟으면서도 징계는커녕 그 어떤 견제나 비판도 수용하지 않는 천상천하 유일의 절대 권력이 되어버렸다. 이를 두고 판사들은 사법부의 독립이라 일컫는다.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한 발 더 성숙하기 위해서는 법관의 탄핵·징계와 관련된 법 개정과 사법개혁이 절박하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 같다.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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