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래가 꽝인 지방의 무명작가”

  • 이춘호 손동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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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23   |  발행일 2018-02-23 제33면   |  수정 2018-02-23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소설가 이룸
“책 낼 때마다 ‘절필’선언…반향력·호기심 염두
독자에게 반응 없는 무명이라도 작가라서 위안
문학안은 봄, 문학밖은 겨울…내 영혼의 진통제”
20180223
경상·충청·전라 3도의 피를 함께 갖고 있는 소설가 이룸. 그는 누구보다도 지방 무명작가의 열등감과 좌절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항상 신작 소설을 출간할 때마다 절필 아닌 절필 선언을 하게 된다. 하지만 작가란 노력의 산물이라기보다 운명적인 구석이 많기에 그는 오늘도 일상과 창작 사이를 서성거리고 있다.

‘서부의 사나이는 떠나야 멋있다.’ 그것도 ‘잘’떠나야. 난 ‘잘’에 방점을 찍어주고 싶다. 예술 또한 그렇다. 창작욕이 바닥났음에도 뭔가 더 얻을 게 없나 판을 기웃거리는 건 정말 꼴사납다. 깜냥도 안되면서도 예술가임을 입증하려고 아등바등하는 건 더 볼썽사납다.

아무튼 난 아직 무명에 파묻힌, 대구를 맴도는 그렇고 그런 소설가 ‘이룸’이다. 예순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뭘 이루겠다고 필명까지 ‘이룸’이라고 정했는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난 새 책을 낼 때마다 지인들한테 ‘이제 절필’이라고 선언한다. 절필이란 말을 배수진이랍시고 까는 건 절필이 갖고 있는 가공할 만한 반향력, 독자의 호기심, 그걸 염두에 뒀기 때문이다.

이번에 생애 두 번째 장편소설을 펴냈다. ‘설리화야 설리화야(카프카 刊)’. 소설집 ‘핑크하우스’, 장편소설 ‘갓바위’에 이은 작품인데 몇 권 팔리지 않을 것 같은 이게 어쩜 생애 마지막 소설이 될 것 같다. 난 이 책을 위해 직접 출판사도 차렸다. 상호는 ‘카프카’.

그래, 지방에선 전업작가란 ‘어불성설’. 그래서 난 돈부터 벌어놓자 싶어 성서산단의 한 제조업체에 들어갔다. 30년간 종사했다. 독립을 위해 무역회사를 차리고 골프채, 다기능 독서대 사업을 했지만 모두 거덜났다.

그래도 난 무명이지만 작가라서 위안을 받는다. 한국작가? 작품에 분풀이 해봐도 독자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을 받지 못하는, 뭐랄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좀비’ 같은 존재다. 난 요즘 1부의 삶을 정년퇴직하고 가수 장기하의 데뷔 히트곡인 ‘싸구려커피’의 가사처럼 소일하고 있다. 출판사업에도 관심이 있어 달서구 대구출판산업지원센터 4층에 있는 출판사 ‘부카’ 사장과 커피도 마신다. 앞으로 책도 팔고 소설도 가르치고 작가끼리 수다떨 수 있는 편의점 같은 ‘소설공장’을 차리고 싶다. 갑자기 아내의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 가슴에 걸린다.

◆ 무명과 유명 작가 사이

유명하면 천국(天國)이고 무명이면 지옥(地獄)일까? 그래, 난 미래가 꽝인 지방의 무명작가다. 난 내가 담당하고 있는 대구시교육청 산하 문학영재반 아이들한테 곧잘 그런 말을 푸념처럼 들려준다. “유명은 무명한테 신세를 지고 있고 무명 또한 유명과 무관하지 않으니 서로가 서로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셈이다.”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유무상생(有無相生)’과 비슷한 이치다.

그런데 이 나라는 무명에서 유명으로 넘어가면 유명은 단번에 무명을 죽여버린다. 자신은 처음부터 유명에서 출발한 줄 안다. 유명이야 절대로 무명으로 돌아올 수 없겠지. 하지만 무명은 오직 유명을 향한 일념밖에 없다. 그러니 유명은 ‘갑’, 무명은 ‘을’이 될 수밖에 없다.

일본 최고 독설파 소설가로 불리는 ‘마루야마 겐지’가 생각난다. 그와 나는 닮은 게 하나있다. 무역회사 직원. 그는 1963년 도쿄의 한 무역회사에 취직한 다음해 회사가 도산하자 소설로 돌파구를 찾는다. 1966년 그는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하면서 일본문학사상 최연소 수상자로 파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는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나기 위해 스스로 무명의 경지로 넘어간다. 일본 북부 산악지역인 오마치에 유폐돼 소설 쓰기에만 매진하고 있다. 그는 74세. 나는 59세.

전북 김제시 금구면 용전부락에서 태어났다. 8남매의 막둥이였다. 맏형과는 무려 25년 터울. 할아버지는 훈장이었다. 할머니는 해묵은 책을 좋아했다. 나도 그 영향을 받았다. 할매가 손자 책 읽어주며 스스로 감동해서 자신도 모르게 내 사타구니에 떨어뜨린 눈물 한 방울, 따지고 보면 그게 내 소설의 유전자로 내려앉는다.

12세에 난 충청도 사람이 된다. 대전으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그해 10월에 대구로 온다. 침산초등을 찍고 성광중에 들어갔고 2학년 때 운명의 사나이를 만난다. 국어선생 강순일이었다. 그때 ‘갯마을’의 작가인 오영수의 ‘요람기’를 반죽해봤다. 내 자전적 경험을 패러디해서 소설 한 편을 완성시켰다. 그리고 계성고에 들어간다. 소설가인 이수남 선생이 있었다. 그는 당시 교련 선생이었다. 성격도 무척 기괴해서 우리에겐 위협적 존재였다. 난 그때 이미 문학 바이러스에 감염돼 있었다. 점심 시간만 되면 도서실로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문학서적을 독파하기 시작한다. 한국·세계문학를 서성거리다가 엘라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하드보일드한 문체가 인상적인 헤밍웨이한테 매료됐다. 특히 결정적인 작가는 ‘마지막 잎새’의 오 헨리였다. 나는 소설과 연관된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그의 삶과 작품을 베끼려고 노력했으며 무단가출을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문학 안에서는 봄이었지만 문학 밖으로 나오면 겨울이었다. 일상은 모래 씹는 맛. 그래서 곤궁한 내 나날을 망각시켜줄 수 있는 문학은 분명 내 영혼의 ‘진통제’였다.

재수할 때 문학적 발판이 생겨난다. 조카 이름으로 대구고 교지에 작품을 보내봤는데 덜컥 당선된다. 공식적으로 나도 소설가로 첫발을 디디게 된다. 하지만 난 자꾸 태어난 게 저주 같았다. 또 다른 담금질이 필요했다. 그때 해병대가 날 품어주었다. ☞W2면에 계속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 손동욱 기자 dingd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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