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무경계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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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2-26   |  발행일 2018-02-26 제31면   |  수정 2018-02-26
20180226
원도혁 논설위원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4명은 지난 한해 동안 종이책을 한권도 읽지 않았다는 국민독서실태 조사 발표가 얼마전 있었다. 종이책 1권 이상을 읽은 비율인 연간 독서율이 성인 59.9%, 학생 91.7%로 나왔다. 전자책 독서가 조금 늘어났지만, 종이책 독서율이 1994년 조사 이후 최저로 떨어졌다. 다들 필자처럼 이 핑계 저 핑계로 독서에 소홀한 것이다. 필자는 그래도 1년에 최소한 서너권은 읽는다. 독자에게 좋은 글을 선보여야 하는 직책을 가진 자가 책을 멀리한다면 직무유기나 다름없다. 할 말이 없지는 않다. 매일 10개가 넘는 신문을 읽고, 하루 1천건 넘게 전송되는 연합뉴스 기사를 일단 제목만이라도 다 체크해야 하는 만만찮은 상황이다. 혹사당한 눈이 아프고 뒷머리는 뻐근한 일상에서 제대로 독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최근에 힘들게 읽은 책이 켄 윌버 작 ‘무경계(No Boundary)’이다. 완독까지 한달가량 걸렸는데 심리학과 융합된 철학적인 내용이어서 진도가 더뎠다. 게다가 주로 저녁에 읽으니 잠이 오거나 눈이 아프면 몇장 못 읽고 덮어야 했다. 평소 테니스 치는 시간, 텔레비전 스포츠 중계 보는 시간, 술 마시는 시간에 몰입했더라면 금세 독파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천재 철학자로 평가되는 저자가 23세 때 쓴 이 책은 심리학과 동서양 신비사상을 망라했다. 너무 어려워서 간단하게 요약하기 곤란하지만, 사람들 각자가 지닌 근원적인 각성과 정체성 자체에는 원래 아무런 경계가 없다는 것을 대전제로 방법론을 설파한다. 스스로 정하고 만든 기준과 경계를 없앰으로써 인간의 능력을 확대할 수 있고, 단계별 훈련을 통해 실현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내 사고의 용량이 커진 것 같아서 뿌듯했다. 안·밖, 좌·우, 음·양, 선·악, 빈·부, 미·추, 생·사 등 반대 개념에 대한 인지 기준에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서로 멀리 떨어진 기준의 경계가 가까워졌고, 대립각의 예봉이 깎여 두루뭉술해진 느낌이다. 이는 세파에 시달리고 단련된 남자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관대해지는 현상과는 다르다. 그리고 사물의 경계가 옅어진다고 해서 도에 통달한 선인처럼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남발하거나, ‘많다는 것은 없는 것이고, 없다는 것은 많은 것이다’와 같은 궤변을 강조해서도 안될 것이다.

위에 언급한 몇가지 반대 개념에 대해 무경계 논리를 대입해 보면 이렇다. 길거리 차량들은 좌우로 나눠 다닌다. 어린시절부터 고착된 관념은 차들은 오른쪽 길로 다녀야 하고 사람들은 좌측통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과 미국 등 대다수 국가에서는 맞다. 차량 운전석은 왼쪽에 배치돼 있다. 하지만 일본과 영국에서는 정반대다. 차들은 도로 왼쪽 길로 다니고, 운전석은 오른쪽에 붙어 있다. 오른손과 왼손 사용에 대한 생각도 변화하고 있다. 어린시절 밥상 앞에서 왼손으로 숟가락을 들었다가 어른들로부터 혼이 난 기억이 있다. 이처럼 이전에는 왼손잡이를 기피했지만 지금은 왼손잡이를 더 이상 꺼리지 않는다. 오히려 테니스·탁구·핸드볼 등 상당수 구기종목에서는 왼손잡이의 강점이 더 돋보이는 시대다. 좌우의 고정관념이 희석되고 경계가 사라지고 있는 셈이다. 원수와 은인의 개념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을까. 혹자는 ‘원수와 은혜는 꼭 갚아라’라고 삶의 자세를 제시한다. 하지만 원수와 은인의 경계를 줄여주는 선각자들의 자세도 의미있다. ‘은혜는 최대한 갚아야 한다. 그러나 원수는 가능하면 용서해라’로 수정이 가능하다. 원수는 용서해 주는 게 최선이고, 용서가 안되면 잊어버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풀지도 못할 원한을 안고 사는 것은 악취나는 도시락을 차고 다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보통인에게 무경계 단계로의 수련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리고 관념의 경계는 어디에나 상존한다. 그렇더라도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등 고착된 경계를 완화하려는 시도는 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와 조직에 유익한 일이라면 더욱더 그러하다.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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