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람] 르포작가 서분숙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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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09   |  발행일 2018-03-09 제41면   |  수정 2018-03-16
“파업 현장이 나의 직장…비정규직의 울음 현장문학으로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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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자동차, 성주 사드 농성장 등 전국의 주요 노동파업현장을 누비면서 노동자의 행복,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윈윈세상을 꿈꾸는 글을 적고 있는 르포작가 서분숙씨는 현재 심각해지고 있는 일부 정규직 노동자의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을 노동문화의 최대 걸림돌로 고발한다. 세월호, 4대강 공사, 밀양송전탑반대 투쟁 현장의 목소리를 담아낸 서분숙씨가 저작물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분숙씨(51). 국내 파업현장을 누비는 전국구 르포작가. ‘울산저널’ ‘참세상’, 노동당 기관지인 ‘미래에서 온 편지’ 등 유력 진보잡지에서 나름대로 필명을 날렸다. ‘현대차 노동자들, 참교육의 선봉에 서다’란 글이 2006년 15회 전태일 문학상 기록글 부문에 당선됐을 때부터 문단에서도 입지를 확보하게 된다.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그녀. 노동자 해고도 부당성이 인정되면 참지 않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서 전국에 고발을 하기도 한다. 

지금은 ‘한국판 학살의 실체’를 추적하고 있다. 특히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10월항쟁’ 때 희생당한 사람들과 그 유족의 삶의 궤적을 자기만의 호흡으로 정리해나가고 있다. 이 일환으로 ‘대구 10월문학회’에도 가입했다. 파업현장을 순례하고 나면 반드시 보고서 같은 르포집을 펴낸다. 그게 르포작가의 의무라고 여긴다. 최근에는 ‘팥빙수와 햇살’(경기도 교육청 刊)이란 세월호 관련 책도 냈다. 모두 13권으로 묶인 이 책의 공동집필자는 무려 100여명. 그녀는 단원고 2학년10반, 2명의 희생자를 다뤘다. 세월호 이야기 대신 죽기 전 아이들의 최고순간을 기록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 책이 유족에게 졸업앨범처럼 전해지길 바랐다. 2014년엔 ‘섬과 섬을 잇다’(한겨레신문 刊)를 엮었다. 전국장기투쟁사업장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담은 내용이다. 만화가 7명, 르포작가 7명 등이 공동집필자로 참여했다. 그녀는 이 책에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투쟁 파트를 맡았다. ‘밀양을 살다’(오월의 봄 刊)는 15명이 공동으로 출간한 것. 밀양시 단장면 용회마을 김옥희씨의 삶과 투쟁을 구술로 기록한 것이다. 김씨는 밀양송전탑투쟁위원장의 부인인데 농사로 너무 바쁜 남편을 대신해 위원장 대역을 맡는다. ‘할머니의 강’(나한기획 刊)은 그녀의 첫 동화책. 4대강 공사와 관련해 한국작가회의 작가들과 함께한 7일간의 낙동강 상류 도보기다. 처음에는 오마이뉴스를 통해 발표됐고 나중에 동화로 갈무리된다. 사람의 목숨이 강으로 환원되어가는 과정을 잘 담아냈고 현재 여러 병원의 치유도서로 인기다.

◆ 가난이 키워낸 투쟁심

그녀는 대구 동구 신암동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블루칼라 집안이었다. 엄마는 칠성시장 좌판 노점상이었다. 아버지도 노동자였다. 1986~88년 노점상 단속은 너무 무지막지했다. 엄마는 늘 용역으로 고용된 단속반한테 짓밟혔다. 그 현장을 자주 목격했다. 시장에서 망연자실, 퍼질러 앉아 울부짖는 엄마 옆에서 그녀도 하염없이 울었다. 잡혀간 칠성파출소 앞에서 “우리 엄마 내놓아라”면서 울부짖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녀의 투쟁심은 학습된 게 아니라 생존의 현장에서 저절로 발화됐다.

대구대 사범대 시절 유물론 관련 책을 탐독했다. “엄마의 가난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 때문이라 여겼고 그래서 엄마의 저항은 매우 정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항은 아주 소중하고 잘 싸워야 인간답게 살 수 있죠. 싸움의 아름다움과 소중함, 역사발전 개념 등이 귀에 쟁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노동자 부모님 생존의 현장 자주 목격
인간답게 살수 있는 정당한 저항 체험
생활고에 휴학…갑의 세상 맞서 투쟁
현장문학 간절…문학·사회운동 결합

정규직의 비정규직 노동자 차별 제기
세월호 희생자 2명 최고 순간도 기록
울산노동자문학인 연대…견제도 심해
노동의 위선과 빈익빈 부익부 고발 중



하지만 대학을 계속 다니기가 어려웠다. 생활고 때문이었다. 87년 휴학하고 나와 분식집 등에서 일을 했다. 이때 노동법 사각지대에서 얼마나 끔찍한 횡포가 일어나는가를 절감했다. ‘갑의 세상’이었다. 을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차별에 대해 그 어떤 문제의식도 갖지 못했다.

87년 민주화 투쟁에 가세를 했다. 투쟁하는 거리가 그녀에겐 너무 편하고 좋아 보였다. ‘짱돌’을 집어들었다. 복학한 뒤 교내 문학회 동아리에 가입해 ‘문학운동’을 시작했다. 대구대중문화예술운동연합의 일원이 된다. 그게 나중에 ‘대구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으로 발전하게 됐다. 영남대, 대우기전 등 지역내 여러 파업현장을 누비면서 현장의 목소리를 시로 뿜어냈다. 그 시를 걸개로 만들어 집회장에 내걸고 직접 낭송도 했다.

각종 노조가 출범할 시점이었다. 그와 맞물려 각종 문화운동이 분출했다. 그녀는 학생운동보다 문화패 활동에 치중했다. 그때 노래는 ‘소리타래’, 극단은 ‘함세상’, 문학은 청년문학회와 노동자문학회가 주도하고 있었다. 대구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내 문학분과 창작팀에 소속돼 활동했다. 현재 극단 가인 대표 김성희, 일본군위안부 역사관 희움의 이인순 관장 등이 그때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이다. 문학작품을 전파하기 위해 예술마당 솔 등에서 시민대상 문학강좌도 많이 열었다.

졸업을 했지만 취업은 포기했다. 일단 문화운동가로 살고 싶었다. 신춘문예 등을 통해 대중적 상업작가로 크고 싶다는 욕망은 전혀 없었다. 항상 현장문학이 간절했다. 문학과 사회운동을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노동문학판으로 들어가다

다시 대구노동자문학회인 ‘글바다’에 들어간다. 문해청, 황죽 등이 그때 만난 작가다. 문해청은 상신브레이크 파업현장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로 복직투쟁을 하고 있었다. 그를 만나 노보도 만들었다. 학원 강사로 번 돈을 활동비로 사용했다. 그땐 노동문학에는 지원·보조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녀는 93년 전국 최고급 파업문화가 진을 치고 있던 울산으로 건너간다. 그녀의 나이 27세.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거기서 분출된 각종 파업 에너지는 대구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울산 노동자문학의 리더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울산 노동자문학인과 연대했다. 가난하고 힘든 사람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는 문학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진보에도 대립각이 존재했다. 파벌이 있었고 진영이 있었다. 대구에서 굴러온 그녀를 경계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녀는 ‘노동지상주의’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전국의 각급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모순 타파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단번에 견제를 당한다. 심지어 ‘스파이’로 의심받기도 했다. 맘고생이 너무 심했다. 하지만 울산은 떠나지 않았다. 현재 그녀는 울산시 북구 매곡동에서 살고 있다.

지난 세월, 그녀가 지나온 파업현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투쟁, 서울 쌍용자동차, 전국기간제교사 정규직전환투쟁, 4대강 투쟁, 현대미포조선 비정규직투쟁,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투쟁, 울산 전교조와 공무원노조투쟁, 부산 생탁막걸리와 한남택시 고공농성, 거제 옥포크레인농성, 구미 아사히글라스투쟁, 밀양송전탑건설반대투쟁, 광화문 촛불집회, 세월호 집회…. 최근에는 성주 사드반대 투쟁현장인 초전면 소성리에서 농성일지를 편지 형식으로 SNS를 통해 전해주고 있다. 이들 작품을 오는 10월 대구문학제와 연계해 거리시화전으로 선보일 작정이다.

◆ 서분숙의 파업일지 엿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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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 누구보다 4대강 개발에 대해 할 말이 많다. “일단 7일간 강변을 걷고 나니 잠을 잘 때도 몸이 강을 따라가는 것 같았어요. 강을 걸어보면 강은 절대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고 분리되어서도 안 된다는 걸 절감하게 되죠. 그런 마인드를 갖게 되면 절대 4대강 개발 같은 발상은 할 수 없습니다. 개발의 맘에는 강이 없습니다. 오직 힘(권력)밖에 없었겠죠.”

강을 걸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허리 수술을 받고 입원 중이었다. 준설 현장 앞에서 더 가슴 아팠다. 공사 현장이 여러 쇠붙이로 이어져 있는 엄마의 척추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제대로 막지 못하고 그냥 화만 내고 있는 저의 무책임과 무력감…. 저 역시 4대강 개발의 공범자 같았어요.”

어느 날 그녀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철탑농성장에도 올라갈 수 있었다. 르포작가였기 때문이다. 농성장은 울산 현대자동차 명촌공장 앞 철탑 중간. 고작 9.9㎡ 남짓한 극도로 좁은 공간이었다. 농성 6개월을 넘긴 30대 청년 노동자 2명의 망가진 육체를 직접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몸에 붙어 있던 근육은 어느새 무서리 맞은 채소처럼 흐물흐물해져 버렸다.

“르포작가,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는 사람에게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바로 우리 옆에 있었구나 하는 작은 뉘우침 같은 걸 일궈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웃고 있다고 해서 온 천지가 스마일세상이 아니라는 걸 자각하게 해주는 것이죠.”

그녀는 기존 문단과도 대립각을 세운다. 현장의 목소리가 빠진 작가정신은 ‘허구’라고 외친다. 그녀는 아직도 비정규직 글쟁이. 파업현장이 그녀의 최대 직장이다. 일어나면 전국의 크고 작은 파업현장으로 출근한다. 그래서 비정규직의 울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 그녀는 지금 ‘노동의 위선’과 ‘노동의 빈익빈 부익부’를 고발 중이다. 인터뷰 다음 날, 그녀가 운동권의 이면을 엿볼 수 있는 의미심장한 편지를 보내왔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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