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 TK, 성폭력 알리기 쉽잖아…피해자 지원·해결 시스템 마련을”

  • 최미애,유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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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10 07:36  |  수정 2018-03-10 07:36  |  발행일 2018-03-10 제6면
대구 ‘미투’서 ‘위드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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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일 오전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검찰 내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영남일보 DB>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자신을 드러내는 성폭력 피해에 대한 폭로를 찾아보긴 어렵다. SNS 익명 제보 페이지를 통해 피해 사실을 알리거나, 스스로 ‘미투’를 하더라도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역 여성계에서는 보수적인 대구의 특성상 실제 피해 사실이 있더라도 알리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지역내 다양한 분야의 구성원들로부터 각 분야에서 벌어지는 성폭력 피해와 이들이 생각하는 해결 방법에 대해 들어봤다. 이들은 “분야별 특성에 맞게 성폭력 피해를 알리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는 지역 문화계
몇해 전 피해 “법적 근거없다” 유야무야
대학 내 빈번한 성범죄에도 다들 쉬쉬
그릇된 性가치관 바로잡을 교육 등 필요
작년 10월 성추행 폭로한 정애향 구의원
“꼬리친 것 아니냐” 오히려 2차 피해까지
지역 여성계, 미투운동 지원 특별위 구성
여성가족재단은 내달 양성평등교육 TF


◆문화계

지역 공연계에서 활동 중인 A씨는 최근 자신의 SNS를 통해 7~8년 전 자신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 공개적으로 알리고자 한 것보다는 문화계에서 용기있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보며 이들을 지지하고 연대한다는 의미였다. 가해자는 A씨에게 선배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제대로 제지하지 못했다. 비슷한 상황이 여러 번 지속되면서 가해자를 만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피하는 것을 택했다. A씨는 “그분은 예전처럼 잘 지내기를 원했다. 당시 내가 피해 다녔던 건 그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한 것이 내 잘못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역 문화계가 ‘한 다리 건너면 다 안다’고 할 만큼 좁기 때문에, 특히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젊은 예술인이라면 피해를 폭로하는 건 쉽지 않다고 했다. A씨는 “SNS로 피해 사실을 알리고 방법을 찾을 기회가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해결방법을 외부에서 찾지 않고 내부적으로도 문화계의 피해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나 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역 문화계에서는 아직 미투가 활발하진 않다. 스승·제자 관계가 견고하고, 이 관계가 작품활동에도 영향을 미치는 데다 지역에서 활동 중인 예술인이 한정되어 있어 털어놓고 얘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A씨가 말한 것처럼 문제 해결을 할 만한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것도 또 다른 요인이다.

지역의 한 연극인은 “몇 년 전에 지역에서도 피해 사례가 있었지만 법적인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협회 차원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유야무야된 적이 있었다. 다만 이제는 분위기가 바뀐 만큼 연극계 내부에서도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설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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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여성가족재단은 세계 여성의 날(8일)을 맞아 미투 운동을 응원하고 동참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대구여성가족재단 제공>

◆직장

지역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B씨(32)는 지난해 납품을 위해 한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가 성적 농담을 들었다. B씨는 “‘목소리가 너무 예쁜데 전화 끊지 마라. 목소리만 들어도 얼굴이 예쁠 것 같다’는 업무와 전혀 상관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그 업체가 중요한 거래처였기 때문에 상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부서가 바뀌었지만 B씨는 아직도 그때 일을 잊지 못한다. B씨는 “직장 내 성문제는 결국 갑을 관계에서 비롯된다. 주위에서도 을에 대한 성희롱을 정말 많이 들었다. 특히 계약직 직원들의 불안정한 고용형태가 이런 문제를 발생시킨다”고 말했다. 지역의 제조업체 관리부서에서 일한 C씨(34)도 “직장 내 위계질서가 이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수행비서 문제에서도 나왔듯 경리·비서는 결국 상급자와 1대 1로 있을 때가 정말 많고, 상급자에겐 절대적인 ‘을’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직장 내 분위기 전환과 동료 직원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B씨는 “동료 직원이 정말 중요하다. 직장 내 성희롱을 당했을 때 말할 사람은 동료들밖에 없다. 처음 말을 들은 동료가 도움을 주면 용기를 얻을 수 있고, 그 동료 역시 아무일 아니라는 듯 넘어가면 피해자는 어디에도 말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C씨는 “직장 내 분위기가 바뀌어야 한다. 내가 윗사람이니 마음대로 한다는 생각은 결국 이런 문제를 일으킨다”고 했다.

◆대학

지역의 한 대학에 다니는 D씨(22)는 최근 대학 내에도 불고 있는 미투 운동을 “바람직한 현상이다. 대학 내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확산돼 모두 올바른 성 가치관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대학 내 성폭력 피해에 대한 폭로는 주로 SNS의 익명제보 페이지 ‘대나무숲’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D씨는 “그동안 학교 내에도 빈번하게 성범죄가 발생했지만 다들 쉬쉬하는 분위기였다”며 “캠퍼스 커플의 성관계 여부가 농담거리로 치부되는 일, 누구와 잤다는 이야기가 남학우들 사이에서 자랑거리가 되는 일 등 학교 내에도 빈번하게 성희롱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의 또 다른 대학에 다니는 E씨(24)도 “낯 뜨거운 메뉴판부터 서빙을 하는 여학생들의 야한 복장까지 학교 축제를 보면 학생들의 그릇된 성 가치관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대학 내에서 성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D씨는 “필수교양과목으로 남자와 여자가 모두 들을 수 있는 성 교육을 넣어야 한다”며 “이런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1학년 때부터 교양과목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공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씨는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두 논의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 단순히 누구를 고발하는 것에 그치면 결국 시스템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공론의 장이 꼭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정치권

지역에서 공개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분야는 정치권이 유일하다. 동료 구의원에게 입은 성추행 피해 사실을 밝힌 정애향 수성구의원은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잠이 오질 않는다. 정 구의원은 “정치인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앞장 서야 한다는 의지가 있었다. 나는 구의원이니까 언론에도 알려지지만 일반적인 여성들은 피해를 입고도 말 못하고 사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며 미투에 동참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정치인은 유권자에게 표를 얻고 도와드리겠다고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강조했다.

정 구의원은 피해를 폭로한 이후 2차 피해를 입었다고 했다. 그는 “대구는 보수적이다 보니 오히려 가해자는 떳떳하게 다니고 있고 나한테는 ‘네가 꼬리친 것 아니냐’고 한다. 언론에 내 이름이 등장하면 ‘그 사람이 잘못한 건 안다. 너무 오래 얘기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고 말했다.

정 구의원은 폭로만이 이어지고 있는 미투 물결에 대한 우려도 나타냈다. 그는 “미투 릴레이가 이어지고 있는 것은 좋은데 자꾸 늘어나기만 하는 것 같다. 나만 해도 지난해 10월 검찰에 고소했지만 아직까지 결과를 알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에게 불이익이 가지 않게 하려면 빠른 조치가 되도록 법으로 해결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여성계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지역 여성계에서도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지역 여성단체의 연합인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은 지난 5일 ‘왕들의 세상 뒤집기’ 토론회를 통해 지역에서 미투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일단 지역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 사실을 알릴 수 있는 SNS 창구를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강혜숙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상임대표는 “지역에서 피해 경험을 쉽게 털어놓지 못한 것은 사례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지역의 보수성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지역의 현실을 반영해 성폭력 피해를 해결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존에 운영 중인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상담 창구도 있다. 대구여성의전화(053-471-6483)는 전화 또는 방문 상담을 통해 피해자를 만나고 있다. 김정순 대구여성의전화 대표는 “미투 운동이 유명인을 중심으로 진행되다보니 일반인 피해자들이 어디에 말해야 할지 모른다고 들었다. 그런 경우 대구여성의전화를 찾아오면 된다”고 말했다.

대구여성가족재단은 최근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응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들은 다음 달 성차별적 문화를 바꾸기 위해 양성평등교육 TF를 구성해 사범대·교대 예비교사,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교육을 진행할 계획이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유승진기자 ysj1941@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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