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맹의 철학편지] 공부는 왜 할까, 책을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삶의 반성·믿음·소통·공감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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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16   |  발행일 2018-03-16 제39면   |  수정 2019-03-20
20180316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의 책들을 보고 있다. 밤은 깊어오고, 나는 ‘막막하다’는 생각만 되뇌고 있다. 곧 절판되리라는 생각 때문에 사 모은 책들이, 머리말만 읽고 꽂아둔 읽지 않은 책들이 너무 많구나. 죽기 전에 이 책들을 다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수많은 마르크스들, 들뢰즈들, 푸코들, 아렌트들, 스피노자들, 니체들, 아감벤들, 랑시에르들, 발리바르들, 알튀세르들, 마키아벨리들, 레닌들, 융들, 헤겔들, 데리다들, 바르트들, 바슐라르들, 바디우들, 네그리들, 신자유주의들, 양자역학들, 불경들…. 이 책들은 다 어디에 쓰일 수 있을까? 장식용이나 허세라고밖에 할 수 없는 이 책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오늘은 더 막막하고 우울하다.

태형아, 그래서 나는 오늘 너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서, 나에게도 물어보기로 했다. ‘우리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무얼까?’ ‘똑똑해 보이기 위해서?’

그러나 똑똑해 보이기 위해선 공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말을 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차라리 낫겠지. 많이 알기 위해서? 그러나 모든 방면에서 많이 아는 학자들이 드물다는 것과 그들이 많이 아는 것에 비해 현명하게 산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어. 그렇다면 먹고살기 위해서? 좋은 학교와 직장에 가기 위해서? 현실적인 대답이긴 하지만,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의 입장에선 전적인 자기 부정이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답이겠지.

철학자 푸코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이 문제에 대해 그는 ‘자기 배려’ ‘자기 수양’이라는 고전적인 표현을 사용해. 죽기 1년 전인 1983년 버클리대학 강연에서 푸코는 이런 말을 했어.

“오늘날 우리에게 자기 배려 개념은 약화되고 모호해졌습니다. 자기 배려는 소크라테스의 자기 인식이나 자기 포기를 내포하는 그리스도교 금욕주의에 의해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특징적인 도덕의 원리가 무엇이었냐고 묻는다면 즉각적으로 뇌리를 스치는 것은 자기 배려가 아니라 아시다시피 ‘너 자신을 알라’일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에 대한 얼마간의 부정적인 푸코의 이 말. 나는 이렇게 표상해서 받아들였어.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 이데아인 하늘의 태양과 우리 마음속의 진리인 금강석을 바라보는 일이라면, 자기 배려는 자신의 몸으로 눈을 돌려 그 몸이 걸친 옷과 먼지와 티끌을 만지고 그것이 어떻게 나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인지를 찾는 일이라고.

관계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해.

“자기는 자기와 맺는 여러 관계 외의 그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는 관계입니다. 자기는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주어져 있는 구조화된 어떤 것이 아닙니다.”

푸코는 ‘인간’은 근대의 발명품이고 ‘나’라는 주체는 주어져 있는 현실이 아니라고 해. 각자는 각자의 관계를 통해 각자 자신이 되는 것이므로 내 몸의 옷과 티끌과 먼지가 어떻게 나와 관계를 가졌는지를 아는 것, 혹은 ‘어떻게 해서 우리 자신을 현재의 우리로 만드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지. 물론 그 관계에 대한 앎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진정 중요한 것은 그 관계를 배려하고 돌보고 살리는 일이겠지만 말이야.

많은 학자들이 푸코의 ‘비역사성’ 혹은 ‘반역사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푸코의 이론으로는 사회변혁의 지지대가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이지. 이유 있는 지적이기도 해. 도대체 지금이 어떤 때인데 ‘자기 수양(돌봄)’ 따위를 이야기한단 말인가? 동시대의 철학자 사르트르도 그 비슷하게 푸코를 비판했다고 해. 여기에 대해 푸코는 강력하게 비판하지.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대로 역사를 사용하는 ‘역사의 소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역사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푸코를 좀 더 많이 경유해야겠지만, 오늘은 이 ‘역사의 소비자’란 말을 기억해 놓도록 하자. 이 말은 이렇게 응용해도 되겠지. ‘사상의 소비자’ ‘이념의 소비자’ ‘정치의 소비자’ 등. 어쩌면 우리는 공부와 독서를 소비하면서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어. 푸코의 자기 수양은 유가철학의 자기 수양의 목표인 ‘수기치인(修己治人)’과 ‘내성외왕(內聖外王)’의 도리와 많이 닮아있는 것처럼 보여. 유가에서도 공부와 수양은 소비하기 위해서거나 지위와 자산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지. 푸코는 우리에게 정치적·윤리적·사회적·철학적인 문제는 개인을 국가와 그 제도들로부터 해방시키려는 시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국가 및 국가와 결부된 개인화의 유형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말하지. ‘수세기 동안 우리에게 강제되었던 개인화의 유형을 거부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 새로운 형태의 주체는 ‘자기 돌봄’을 통해 궁리되어진다는 것.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태형아, 내가 지금껏 제대로 공부했는지 의문이 드는구나. 아울러 수양으로서의 공부는 책이라는 텍스트를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내 삶에 주어진 모든 관계에 대한 반성과 믿음과 소통과 공감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요즘 뉴스에 나오는 여러 사건을 보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어. 수양에 관한 오늘의 이야기는 푸코의 책 ‘비판이란 무엇인가’(동녘 刊)를 참고하렴. 시인·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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