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모든 삶은 흔적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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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24   |  발행일 2018-03-24 제23면   |  수정 2018-03-24
[토요단상] 모든 삶은 흔적을 남긴다
최환석 맑은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테일러 셰리든이 연출한 영화 ‘윈드 리버’에는 치안이 보장되지 않는 미국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벌어진 소녀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두 사람이 나온다. 한 명은 FBI 요원이고, 한 명은 야생동물 사냥꾼이다. 누가 죽더라도 알기 힘든 황량한 설원 위에서 FBI 요원은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워진다. 반면에 사건의 본질에 빠르게 접근하여 그 요원의 목숨을 구하고 범인을 찾아낸 이는 사냥꾼이다. 그는 오랜 경험으로 범인들이 남겨놓은 눈 위의 흔적이 무슨 의미인지 재빨리 알아낼 수 있었다. 그 흔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인생이라는 설원 위에 우리들이 무심코 혹은 의도적으로 흩뿌려놓은 자국들 같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은 항상 흔적을 남기며, 누군가는 그 흔적을 알아본다.

누군가는 흔적이 드러나면서 자신의 명예와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누군가는 구속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흔적을 말끔히 지웠다고 믿었고, 설령 흔적이 남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지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면 치외법권이라고 믿었거나.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두 가지 있다. 우리는 감정을 가진 존재이며 그 감정을 죽을 때까지 기억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또 하나는 시간의 힘이다. 흔적은 옅어질 망정 시간은 우리의 감정과 기억을 모아 그 모든 흔적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또렷이 보여준다.

인생을 도덕적 시각이 아니라 우리가 흔히 카오스 이론이라고 부르는 ‘비선형 물리학’적 시각으로 보면 새로운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창발적 현상을 보인다. 내가 한 행위들은 좋든 나쁘든 주위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세상은 네트워크를 이루고 있다. 이런 크고 작은 영향들이 정보의 형태로 네트워크를 흘러 다닌다. 인류는 이런 정보를 주고받음으로써 협력을 촉진하려는 본능을 지녔다. 여러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사람이 있다면 내가 피해 입기 전에 그 사람을 집단에서 몰아내는 것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로 뒷담화를 통해 이런 정보들을 주고받는다.

여기에는 흔히 학자들이 ‘간접상호성’이라고 부르는 ‘평판’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누가 믿을 만한지 혹은 누구를 조심해야 하는지 뒷담화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사회적 평판이 생겨난다. 평판의 힘은 엄청나다. 누군가가 나의 행동을 지켜보거나 흔적을 알아볼 수 있으므로, 당장 어떤 보상도 없더라도 누군가를 돕고 협력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부정확할 수 있으므로 잘못된 평판으로 누군가는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소시오패스들은 이런 초기의 부정확성을 잘 이용한다. 그들은 자신의 본질을 감추고 외부 사람들에게 자신이 선한 사람인 것처럼 위조된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불확실성은 줄어들고 평판은 점점 더 정확해지고 날카로워진다. 누군가는 그의 본질을 알고 있으며, 그런 사람들이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늘어난다. 이것이 시간의 힘이다.

시간이 갈수록 평판이 정확해질 수 있는 데에는 우리의 감정이 큰 역할을 한다. 감정이 별로 실리지 않는 사건은 일주일만 지나도 기억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노나 감동처럼 강한 감정이 실린 사건은 세세한 부분까지 평생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런 감정은 정보로 작용하여 네트워크를 떠다니며 흔적을 남기고, 세월이 갈수록 쌓이는 정보들은 네트워크에서 서로 부딪히며 상승작용을 한다. 흔적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는다.

또한 시간이 갈수록 실수의 가능성이 커진다. 자신이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자신할수록 자신의 본질이 드러나는 실수의 가능성은 점점 높아진다. 누군가에게는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순간과 사건으로 인해 상황은 급변한다. 이것이 창발성이다. 마치 물이 0℃에서 갑자기 얼음으로 변하듯이. 이때에 다수가 등을 돌리거나 고발을 하고 대중이 촛불을 들기도 한다. 누군가는 쇠고랑을 차거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니 제발 인생을 잘살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럽게는 살지 말자.최환석 맑은샘정신건강의학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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