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공정사회, 신분사회

  • 허석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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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26   |  발행일 2018-03-26 제31면   |  수정 2018-03-26
[월요칼럼] 공정사회, 신분사회

요즘 ‘현대판 음서제’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공공기관, 금융권 등에서의 채용비리와 관련해서다. 음서(蔭敍)란 게 공신과 고관대작의 자제에게 관직을 거저 내주던 고려·조선의 관리채용 제도이니 틀린 비유는 아니다. 그 시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던 만큼 ‘혈통 낙하산’이 당연시됐다. 그렇지만 음서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알다시피 과거제(科擧制)도 있었다. 과거제는 788년 신라 원성왕 때 처음 도입됐지만 본격 시행된 것은 고려 광종 때(958년)부터다. 광종은 음서제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던 호족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제를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로선 관리 채용 방식의 일대 변혁이었겠지만, 선발 분야와 인원이 제한적이어서 음서제의 보완수단 정도에 그쳤다.

과거제는 조선시대가 되어서야 일반적인 관직 진출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그럼에도 급제(及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문헌에 따르면 총 804회가 시행돼 1만5천여명을 뽑았는데, 평균 경쟁률이 2천대 1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사정이었으니 수십 년을 공부해도 합격하기가 어려웠다. 최고령 합격자가 무려 83세였다는 기록만 봐도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알 만하다.

과거제는 조선 중기까지는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졌지만, 후기로 접어들면서 부정과 비리로 얼룩졌다. 실학자 박제가는 1778년에 쓴 북학의(北學議)에서 과거장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옛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응시한 유생이 400명이 넘는다고 축하를 받은 일이 있었다. 지금은 그 100배가 넘는 유생들이 들어오는데, 심한 경우에는 막대기로 상대를 찌르고 싸우며, 문에서 횡액을 당하기도 하고…(중략)…하루 안에 과거를 보게 되면 머리털이 하얗게 세고 심지어는 남을 살상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이처럼 과거장이 난장판이 된 이유는 주로 앞자리 다툼 때문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시험관들은 수만 장의 답안지 중에서 선착순으로 접수된 몇백 장만 채점했기에 답안지 제출에 유리한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합격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세도가나 재력가는 장안의 건달들을 고용해 자리를 선점했는데, 이들에 맞서 앞자리를 차지하려던 유생들이 몽둥이찜질을 당하고 심지어 맞아 죽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를 보면 조선 후기의 과거는 형식상으로는 공정경쟁이었지만 실제로는 특권층의 신분세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던 셈이다. 이처럼 세도가가 망가뜨린 관리등용시스템이 조선의 몰락을 부추겼음은 불문가지다.

시대가 바뀐 지금은 어떤가. 불행하게도 사정이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정부가 관리하는 공무원 시험을 제외하고 공공기관과 공기업, 은행을 비롯한 민간 기업 등에선 음서제 못지않은 채용 특혜와 비리가 만연해 있다. 특히 ‘신의 직장’이라는 공공기관의 채용 비리는 충격적이다. 정부의 특별점검 결과, 전체 공공기관(1천190개)의 80%에서 크고 작은 채용 꼼수가 있었다니 해도 너무했다. 그 수법도 기가 막힌다. 점수 조작은 기본이고 아예 원서조차 안 받고 ‘낙하산’을 뽑은 경우도 있었다. 알다시피 채용 청탁의 중심에는 부와 권력을 거머쥔 현대판 세도가들이 있다. 그들은 폭력만 동원하지 않았을 뿐, 조선 후기 세도가 뺨치는 온갖 반칙을 일삼고 있다. 그 피해는 당연히 돈도 백도 없는 ‘흙수저’들이 감내할 수밖에 없다.

최근 채용비리가 고구마 줄기처럼 드러나고 있지만, 이는 특권층의 반칙과 담합을 보여주는 일례에 불과하다. 굳이 이런 방법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부와 명예, 권력을 대물림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다. 무엇보다 동종교배를 통해 형성하는 기득권 카르텔이 갈수록 견고해지는 게 문제다. 이 때문에 배경 없이 능력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 지 오래다. 실제로 ‘개천의 용’도 멸종되다시피 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기로에 서 있다. 선진국으로 향하는 공정사회로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세습 재산이 계급이 되는 신분사회로 전락할 것인지.

허석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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