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블랙리스트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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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3-31   |  발행일 2018-03-31 제23면   |  수정 2018-03-31
[토요단상] 블랙리스트 논란
최병묵 정치평론가

“민주주의는 나와 남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피고인들은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지원배제 범행을 저지르는 중죄를 범했다.”(2017년 12월 박근혜 국정농단 특별검사팀) “우파정권에서 천안함과 다이빙벨 등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지원을 받는 것이 정권 기조랑 맞지 않기에 검토하라고 했을 뿐이다.”(2017년 10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변호인) 박근혜정부가 작성·실행한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명단(블랙리스트)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 주장이다.

정권을 잡은 쪽은 예산 배분 권한을 갖고 있다. 거둔 세금을 정부 예산이란 형태로 쓴다. 여러 부문의 사람들에게 지원금이란 명목으로 나눠주기도 한다. ‘블랙리스트’란 특정 성향의 사람들을 지원 대상에서 빼기 위해 만든 명단을 일컫는다. 국정농단 재판과정에서 박근혜정부가 만든 9천명이 넘는 리스트가 드러났다. 주로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 지지선언을 했던 사람, 세월호 사건 등에서 진보 성향의 행적을 보인 사람 위주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변호인은 재판에서 “지원배제 정책 자체는 기본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필자는 기자를 30년 넘게 하면서 수많은 블랙리스트 ‘정황증거’를 알게 됐다. 리스트를 입수하지 못했기에 보도를 자제한 것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박원순 현 서울시장 재직 당시 서울시가 지원한 시민단체를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두 사람 다 지원금 배분을 별도 위원회 결정에 따랐다고 했다. 그런데 결과는 판이하다. 시장과 가깝거나 성향이 비슷한 단체들에 돈이 집중됐다.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서울시만 그랬던 게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작년 8월 박성진 중소벤처기업부장관 후보자를 지명했다. 어찌 됐는지 청와대 검증은 통과했다. 문제는 언론 검증에서 불거졌다. 진보매체가 앞장섰다. 박 후보자가 학자 시절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는 정당했다’ ‘대한민국 건국은 1948년’이라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내거나 뉴라이트 역사학자를 초청해 세미나를 열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 지지 세력에게 ‘찍히기’ 딱 좋은 행적이다. 결국 그는 장관이 되지 못했다. 그를 장관에서 빼라는 ‘문건’은 없었다. ‘박성진류(流)’가 문재인정부의 각료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검증 기준 리스트’가 확인된 셈이다.

더 노골적인 상황은 얼마 전 드러났다. 이화여대 최원목 교수가 주인공이다. 그는 주미 경제공사에 응모했다. 정부 심사에서 최고 점수를 받았지만 탈락했다. 그가 청와대 검증팀과의 2월 말 통화 내용을 공개했다. 녹취에서 본인을 청와대 인사검증팀이라 밝힌 이는 “현 정부의 정책 방향에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2002년 바른사회시민회의라는 (보수 성향) 단체에 운영회원으로 참여하지 않았냐” 등을 물었다. 최 교수의 탈락 사유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박근혜정부가 만든 블랙리스트와 문재인정부 인사검증팀의 질문 기준 사이에 어떤 근본적 차이가 있는 것인가. 최 교수의 통화 내용 공개에 대한 청와대 관계자의 반응은 우리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는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맞는 후보인지를 가리는 것은 당연한 검증 기준 중 하나”라고 했다.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필자는 낙하산 인사(人事)를 옹호하지 않는다. 비판하지도 않는다. 현행 대통령제 아래서 자기 사람 심기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인정하는 쪽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대목은 낙하산 인사를 비난하면서 본인도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은 낙하산이 아니라면서. 위선이다. 차라리 정직하게 인정하라. 대신 이해를 구하라.

블랙리스트 역시 비슷하다. 집권자가 자신의 정치철학과 맞지 않는 사람과 함께하지 않겠다는 것은 집권 프리미엄이다. 모두 다 그런 것을 법의 잣대로 단죄하려면 보복 논란을 부를 수밖에 없다. 대신 무자격 낙하산을 남발했다면 그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최병묵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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