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권력형 범죄와 헌법재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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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04   |  발행일 2018-04-04 제31면   |  수정 2018-04-04
[영남시론] 권력형 범죄와 헌법재판소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교육부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진상조사위원회’는 7개월의 조사 끝에 박근혜정부의 한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을 온갖 불법이 동원된 국정농단 사건으로 규정하고, 당시 장·차관과 청와대 수석, 그리고 교육부 실무자들까지 무더기로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난데없이 검찰조사까지 받게 된 실무자들은 청와대의 지시를 이행했을 뿐인데 억울하다는 장탄식을 토해낼 만하다. 공직자들이 상급자의 지시에 따르는 것은 의무이기도 하지만 그 지시가 불법이었다는 게 문제 아닌가.

대통령의 사저에서 키우는 강아지에게 밥을 주라는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한 비서실 공직자에게 법은 어떤 죄를 물을 수 있을까? 죄책을 따지기 위한 심판의 대상조차 되질 않는다. 범죄구성요건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황에 처한 공직자는 아마도 자신의 고유업무를 제쳐두고 강아지에게 밥을 주러 사저로 출장을 나갈 것이다. 그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것이 범죄는 아닐지라도 인사상의 불이익을 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조직에 속한 사람에게 인사상의 불이익은 쉽게 저항하기 힘든 현실의 위협이다.

인간의 행위와 죄의 문제에 대해 명쾌하게 개념정의를 한 바 있는 실존주의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상급자의 불법지시와 부당한 명령에 따른 ‘범죄’도 정상참작의 사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엄연한 ‘범죄’라 규정한다. 단 그런 유형의 죄는 법원이 심급인 형사범죄와 달리 자신의 양심과 시민사회의 상식이 심급인 ‘도덕적 범죄’다. 그런데 야스퍼스는 법정에서 심판대상이 되기 힘든 공직자들의 이런 ‘도덕적 범죄’가 바로 권력형 범죄의 온상이 된다고 지적한다. 공직자들의 “무수한 자잘한 태만의 행태와 안이한 순응, 부정의를 유치하게 두둔하거나 부지불식간에 촉진하는 행태가 불투명성을 확산시키고, 그 자체로 악이 가능하게 만드는 공적 분위기”를 조성하기 때문이다.

검찰 또는 법원이 전 정부의 권력자들이 ‘정치적 범죄’를 저지를 수 있도록 공적 분위기를 조성해 준 교육부 실무 담당자들의 ‘도덕적 범죄’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예단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누구든 모든 폭력적 수단을 독점하고 있는 국가권력의 부당한 지시에 자신의 양심과 소신을 걸고 저항하거나 거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이다. 그래서 국가권력의 부당한 명령으로부터 개인의 양심과 시민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보호해달라는 취지에서 87년 체제의 헌법에서 헌법재판소를 두도록 한 것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정책은 누가 봐도 국민의 건전한 상식을 짓밟고 역사학자들의 양심까지 난도질하는 무리한 정책이었다. 위헌의 소지까지 있어서 헌법소원까지 청구될 지경이었다. 그런데 정작 헌법재판소는 심리를 2년4개월이나 질질 미루다가 정권이 바뀌고 새 정부가 국정화고시를 폐지하자 ‘위헌 여부를 가릴 권리보호이익이 소멸’되었다는 이유로 심리를 각하했다. 고령의 위안부 할머니들이 하나둘 세상 뜨기만을 기다렸다가 사과할 대상이 소멸되었다고 할 요량인 일본정부의 처신과 무엇이 다른가. 한국사 국정교과서는 전국에서 단 한 학교만 채택이 되었고, 그나마 학생과 학부모들의 반발로 끝내 채택이 무산될 정도로 엉망진창의 수준이었다. 그 사실을 헌법재판관들만 몰랐을까. 헌법재판소의 신속한 결정만 있었더라도 교육부 담당자가 피의자 신분이 되는 일은 없었을 터인데 대통령으로부터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걱정도 없는 헌법재판관들이 도대체 무엇이 두려워 눈앞에서 펼쳐지는 권력의 불법과 편법에 눈을 감고 있었을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범죄를 보고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다면 나 역시 그 범죄에 대해 방조의 책임을 진다. 헌법재판관들은 무죄일까? 야스퍼스에게 묻는다면 한 국가의 헌법재판관에 대한 신뢰를 무너지게 만들고, 권력의 불의에 맞선 인간 상호 간의 연대를 외면한 ‘형이상학적 죄’를 지은 것이라 판결할 것이다. 단 형이상학적 죄의 심급은 법원이 아니라 역사겠지만.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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