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曲기행 .17] 안동 퇴계구곡...퇴계종택 앞을 흐르는 토계천…굽이마다 ‘동방의 朱子’ 발자취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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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05 07:55  |  수정 2021-07-06 14:52  |  발행일 2018-04-05 제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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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구곡 중 5곡 고등암 풍경. 고등암은 이황이 1549년에 지어 한동안 기거했던 한서암을 말한다. 한서암 아래에는 이황이 1551년에 지어 후학들을 가르쳤던 계상서당이 자리하고 있다(위). 퇴계구곡의 2곡 양진암이 있던 곳 근처의 이황 묘. 양진암은 이황이 46세가 되는 1546년 벼슬에서 물러나 잠시 살았던 작은 집의 이름이다.

퇴계구곡(退溪九曲)은 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에 있는 퇴계종택 앞을 흐르는 토계천(土溪川)에 설정된 구곡이다. ‘동방의 주자’로 불리는 대유학자이자 문신인 퇴계 이황(1501~1570)의 체취와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는 구곡이다. 이황이 태어나고 자란 고택, 벼슬에서 물러난 후 지어 살던 집터, 제자를 가르치던 서당, 묘소 등 주위의 유적들을 통해 이황의 삶의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낙동강 본류를 따라 조성된 도산구곡이 이황의 거시적 업적과 철학을 담은 구곡이라면, 이황 고향의 작은 하천 토계천에 설정된 퇴계구곡은 이황의 탄생과 성장, 출세, 귀향과 별세 등 이황의 구체적 삶의 흔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굽이들이다.

토계천은 낙동강의 작은 지류로, 이황이 태어난 온혜리에서 시작해 상계마을의 퇴계종택 앞과 하계마을의 이황 묘소 앞을 지나 낙동강에 흘러든다. 토계리를 지나는 시내는 따로 퇴계(退溪)라고도 한다. 원래 이름은 토계(兎溪)였으나 이황이 냇가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이름을 ‘퇴계(退溪)’로 고친 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나중에 ‘토(兎)’ 자를 음이 같은 ‘토(土)’ 자로 고치면서 지금의 토계가 되었다.

이황을 기리는 퇴계구곡은 이황 후손인 하계(霞溪) 이가순(1768~1844)이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가순은 퇴계구곡을 1곡 사련진(絲練津), 2곡 양진암(養眞庵), 3곡 죽동(竹洞), 4곡 장명뢰(鳴瀨), 5곡 고등암(古藤庵), 6곡 임부동(林富洞), 7곡 양평(羊坪), 8곡 청음석(淸吟石), 9곡 쌍계(雙溪)로 정했다. 퇴계구곡시도 지었다. 하암(下庵) 이종휴(1761~1832), 소은(素隱) 류병문(1776~1826), 동림(東林) 류치호(1800~1862) 등도 퇴계구곡시를 남겼다.

이가순의 퇴계구곡시를 따라 퇴계구곡 이야기를 살펴본다.

◆이가순 퇴계구곡시

이가순은 서시에서 이황의 가문을 신령한 집안이라고 읊고, 이황이 살던 토계천을 주자의 무이구곡에 비유한 뒤 1곡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일곡이라 사진에서 저물녘 배를 부르니(一曲絲津喚暮船)/ 시내가 산 북쪽을 따라 남주로 들어가네(溪循山北入南州)/ 어느 시절에 은어 공물 없어질까(何年却銀唇貢)/ 어촌은 예전처럼 저녁 연기 속에 있네(依舊漁村畵裏煙)’

1곡 사련진은 토계천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으로, 나루터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가순은 사련진에서 뱃사공을 불러 토계천을 거슬러 오른다고 노래하고 있지만, 실제가 아니라 상상이다. 주자가 배를 타고 구곡을 유람했기에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1곡에서 이가순은 은어 공물을 언급하며 백성들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곡이라 산문이 두 산봉우리 마주하고 있는데(二曲山門對兩峯)/ 노을 드리운 연꽃 같은 봄날 자태 아름답네(霞蒸蓮秀媚春容)/ 만권 서적에 묻혀 살기에 참으로 좋은 곳(生涯萬卷眞休地)/ 서쪽으로 도산과 가까워 단지 산 하나 너머라네(西近陶山只一重)’

2곡 양진암은 이황이 한때 기거했던 곳이다. ‘하계마을 독립운동 기적비’가 세워져 있는 하계삼거리에서 퇴계종택 쪽으로 50m 정도 지점의 도롯가인데, 지금은 ‘양진암고지(養眞庵古址)’라 새겨진 작은 표석만 있다. 이가순이 살아있을 때도 양진암은 이미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있었다. 이황이 46세가 되는 1546년 벼슬에서 물러나 이곳에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양진암이라 이름 지었다. 이 양진암 터 뒤쪽 산길을 잠시 오르면 이황 묘소가 있다.

‘삼곡이라 띠집은 조각배처럼 작은데(三曲茅齋小似船)/ 비바람 막지 못한 채 여러 해 지나왔네(不堪風雨庇多年)/ 산은 비고 봉황이 떠나고 대나무 열매도 없어(山空鳳去篁無實)/ 천 길 바위가 맡아 보호하니 가련하구나(石丈千尋任護憐)’

양진암에서 95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3곡 죽동이다. 이황이 잠시 기거했던 곳이다. 현재 몇 가구가 살고 있는 작은 농촌마을이다. 대나무가 많아 죽동이라지만, 대나무 열매가 없고 그 열매를 먹고 사는 봉황도 떠나버렸다. 그런 퇴락한 띠집을 지나며 봉황(이황)이 떠난 모습을 보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이황 고향 토계리 소하천 토계천
주위에 집터·묘소 등 유적 자리
후손 이가순이 설정한 퇴계구곡

퇴계 철학 담은 도산구곡과 달리
탄생∼별세 삶의 궤적 고스란히


◆5곡은 이황이 기거했던 한서암

‘오곡이라 푸른 등넝쿨 고목이 깊고(五曲蒼藤古木深)/ 텅 빈 밝은 집 시내와 숲을 가까이했네(虛明一室擁泉林)/ 창문 앞에는 절로 거문고 타는 바위 있으니(窓前自有彈琴石)/ 그 누가 용문의 이치와 운치를 알겠는가(誰識龍門理韻心)’

4곡(장명뢰) 다음의 5곡 고등암은 등넝쿨 고목이 있는 집을 읊고 있다. 이 집은 이황이 기거했던 한서암(寒栖庵)이다. 주자가 무이정사가 있는 굽이를 5곡으로 설정했듯이 퇴계구곡도 한서암과 계상서당이 있는 곳을 5곡으로 설정한 것이다. 한서암 부근의 탄금석을 거론하며 이황의 학문을 노래하고 있다. 유학에서 ‘거문고를 탄다’는 탄금은 ‘학문을 한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용문은 이황의 가문이고 용문의 이치와 운치는 이황의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육곡이라 시내 돌아 다시 한 물굽이 되니(六曲溪回更一灣)/ 새가 울고 꽃이 피어 바위 관문 둘러 있네(鳥鳴花發繞巖關)/ 산림에서 사는 삶 봄이 와 한창이니(山林日用春來富)/ 하늘 땅이 함께 흘러 만물이 한가롭네(上下同流物物閑)’

6곡은 임부동이다. 고등암에서 300여m 상류 지점의 물굽이와 그 주변이다. 임씨 성을 가진 사람이 만석이나 되는 재산의 부자로 살던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이가순은 임부동의 봄풍경을 읊으며 천지의 이치가 조화롭게 펼쳐지는 이상향임을 노래했다.

‘팔곡이라 비탈에는 어지러운 돌 널려 있고(八曲陂陀亂石開)/ 청음대 아래로 물굽이가 돌아 흐르네(淸吟臺下水彎)/ 사방 산에는 철쭉꽃 해마다 피고(四山年年紫)/ 가마는 가서 돌아오지 않을 줄 잘 알겠네(曠想肩輿去不來)’

6곡에서 1㎞ 정도 거슬러 오르면 7곡 양평(羊坪)에 이르고, 양평마을에서 1㎞ 정도 오르면 8곡 청음석이다. 청음석은 이황의 추억이 서린 바윗돌이다. 평범한 바윗돌이지만, 이황은 고향으로 돌아온 후 숙부(이우)와의 추억이 서린 이곳을 종종 찾곤 했다. 이황은 숙부의 시에서 ‘청음(淸吟)’이라는 단어를 가져와 추억이 서린 바윗돌을 ‘청음석’이라 하고 시도 지었다. 그 시 일부다.

‘어린 시절 모시고 놀던 곳(總角陪遊地)/ 불러 보아도 오시지 않네(吟魂去不回)/ 오직 개울가 바위 소리만(唯餘溪石響)/ 다시 찾아온 것 위로하는 듯하네(似欲慰重來)’

이가순도 이곳에서 청음석에 얽힌 사연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겨들었다.

‘구곡이라 구름 덮인 산이 아득히 보이고(九曲雲山渺然)/ 쌍계가 십 리를 흘러와 앞 시내를 달려가네(雙溪十里走前川)/ 푸른 소나무 고택에 우뚝 서 있으니(蒼松古宅亭亭立)/ 세모에도 도가 서린 땅 변함 없네(道域栽培歲暮天)’

9곡 쌍계는 토계천이 끝나는 곳에 온계(溫溪)와 청계(淸溪) 두 시내가 만나는 굽이다. 이 쌍계가 토계천이 되어 청음석으로 흘러간다. 청계와 온계도 이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시내다.

쌍계 너머 온계 들판 안쪽에 이황이 태어난 노송정 고택이 자리하고 있고, 고택에는 노송이 푸르름을 자랑하며 우뚝 서 있었다. 유학의 도가 쇠퇴하는 시대에도 이황의 학문과 도는 여전히 보존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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