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충남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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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06   |  발행일 2018-04-06 제36면   |  수정 2018-04-06
古宅 텅빈마당의 고요함, 문턱 넘는 손님 반기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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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 오른쪽이 사랑채, 왼쪽이 안채다. 처음에는 53칸이었으나 지금은 그 절반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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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리 백송. 추사가 청나라 연경에서 가져와 고조부 김흥경의 묘 앞에 심었다는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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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묘. 부인 한산이씨, 예안이씨가 함께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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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옹주 홍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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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고택의 서편 영당의 협문 아래로 백송 한 그루와 수선화 가득한 화단이 있다.

아무도 없는 집이 환영을 한다. 목련의 커다란 꽃봉오리가, 매화와 살구나무의 은하수 같은 꽃망울들이, 반들거리는 툇마루에 내려앉은 봄 햇살이, 말을 건네는 듯한 주련의 글귀들이, 텅 빈 마당의 넉넉한 고요가, 문턱을 넘는 발걸음을 반긴다. 사랑채의 주인도 그러했을까. 봄날 꽃을 기다리듯 그렇게, 꽃을 보듯 그렇게, 들어서는 객을 바라보았을까.

영조 딸 화순옹주·추사 증조부 살던집
뒷날 정조가 옹주의 열녀문 홍문 건립
추사가 양자로 가기전 8세까지 살아
어머니와 함께 산 곳이라 자주 찾아와

담장 밖 솔숲 너머에 나지막한 추사묘
먼저보낸 부인 재혼한 아내와 잠들어
유배때 아내에게 쓴 편지 40여통 애정

1960년대 후손들 기거…폐허 가까워
70년대부터 정비…초입에 추사기념관


◆ 용궁리 추사고택

솟을대문이 동쪽을 향해 서 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ㄱ’자 모양의 사랑채 툇마루가 보인다. 마루 아래에 목단 화단을 가까이 두고 너른 마당과 대문간을 내다보는 마루다. 사랑채 서쪽에는 ‘ㅁ’자 형의 안채가 위치한다. 그 서쪽 높직한 자리에는 영당이 있다. 동북쪽 담장을 따라 꽃나무와 과실수들이 자란다. 서쪽 담장 아래에는 수선화 가득 핀 화단에 어린 백송 한 그루가 서있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이 집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머니 배 속에서 24개월이나 있었다고 한다. 1786년 봄, 충청 지방은 극심한 가뭄이었다. 우물이 마르고 풀과 나무는 생기를 잃었다. 6월3일이 되자 돌연 우물에 물이 차올랐다. 나무와 풀이 싱그럽게 되살아났다. 그때, 추사가 태어났다. 아버지 병조판서 김노경(金魯敬)과 어머니 기계유씨(杞溪兪氏) 사이의 맏아들이었다. 고택의 남쪽 담장 밖에 말랐던 물이 갑자기 차올랐다는 우물이 남아 있다.

집은 증조부 김한신(金漢藎)과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가 결혼해 살던 곳이었다. 마을의 서쪽 가장자리에 나지막한 산줄기가 2㎞ 남짓 이어지는데 그 산줄기 동쪽에 기대앉은 53칸 큰 집이었다. 옛날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곳까지 아산만의 바다가 드나들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어쩌면 그래서, 마을의 이름은 용궁이다.

사랑채와 안채의 나무 기둥마다 주련이 걸려 있다. ‘세상에서 두 가지 큰일은 밭 갈고 독서하는 일이다’ ‘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가지와 같다’ 등 모두 추사의 글이다. 그는 이 집에서 7, 8세 즈음까지 살았다. 그리고 8세 무렵 대를 이을 아들이 없던 백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사셨던 이곳을 사랑하여 자주 찾았다고 한다.

남쪽 담장 밖 솔숲 너머에 추사의 묘가 있다. 봉분은 나지막하고 석물은 단출하다. 추사는 열다섯 살 때 동갑인 한산이씨와 혼인했다. 금실이 좋았다 한다. 그러나 5년 만에 아내를 잃었고, 스물셋에 두 살 아래인 예안이씨와 재혼했다. 추사가 제주도 유배 때 아내에게 쓴 편지가 40여 통 전해진다. 예안이씨는 유배 3년째인 1842년 세상을 떠났다. 부음을 받은 추사는 슬픔으로 시를 썼다. ‘어떻게 월로께 호소를 하여/ 서로가 내세에 바꿔 태어나/ 천 리 밖에서 내가 죽고 그대는 살아/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지금 추사의 묘에는 두 부인이 함께 잠들어 있다.

사랑채 뒤편 쪽마루에 걸터앉는다. 좁은 마루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주인 같다. 왼쪽으로 안채의 뒤태가 나란하다. 담벼락 아래 좁은 길이 영당으로 오른다. 영당의 담장 너머 ‘추사영실(秋史影室)’ 편액이 보인다. 내부에는 추사의 제자이자 화가인 이한철(李漢喆)이 그린 초상화 복제본이 걸려 있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설중매 한 그루와 모과나무 한 그루와 눈이 마주친다. 샴페인의 맑은 기포 속을 유영하듯 취한다.

◆ 화순옹주 홍문과 용궁리 백송

고택에는 1960년대까지 추사의 후손들이 살았다. 당시 집은 폐허에 가까웠다고 한다. 1970년대부터 집과 주변이 정비되어 지금은 고택을 중심으로 한 일대를 ‘추사 지구(地區)’라 부를 만하다. 고택 초입에는 추사기념관이 있다. 고택 앞에는 추사 체험관이 있다. 추사의 묘소 옆 솔숲은 쉼터다. 추사고택에서 북쪽으로 조금 가면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와 홍문(紅門)이 나란하다.

홍문은 화순옹주의 열녀문(烈女門)이다. 동갑인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13세에 혼인해 25년을 살았다. 김한신은 마흔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보름 뒤, 화순옹주도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죽음 후 물 한 방울도 삼키지 않았다 한다. 아버지 영조의 만류도 소용이 없었다. 영조는 딸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렸다 하여 정려를 내리지 않았다. 열녀문은 뒷날 정조가 내렸다. 홍문은 정면 8칸, 측면 1칸 규모다. 담장은 최근에 설치했다. 담장을 넘어다보니 묘막(墓幕)은 사라지고 주춧돌만이 가지런히 남아 있다.

홍문 옆에는 백송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 넓지 않은 조그만 언덕에 추사가 남긴 서예작품을 주제로 한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공원에서 북쪽으로 다시 400m 정도를 가면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金興慶)의 묘역이다. 묘 앞에는 천연기념물 제106호이자 우리나라 백송나무 중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백송이 있다.

용궁리 백송은 추사가 24세 때 아버지를 따라 청나라 연경을 다녀오면서 가져와 심었다고 한다. 200년쯤 되었을까. 옛날에는 둥치에서부터 세 가지로 자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을 이기지 못한 두 줄기는 고사했고 이제 한 줄기만 살아남아 그 흰 몸을 창연히 세우고 있다. 아름답다. 처음 보는 질감의 수피다. 처음 보는 흰색이다.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추사의 세한도(歲寒圖)에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 새겨진 인장이 찍혀 있다고 한다.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추사의 뜻은 아랑곳없이, 추사의 글을 빌려 절박하게 말한다. 장무상망을 빕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서울 방향으로 가다 회덕분기점에서 30번 대전당진고속도로를 탄다. 예산 수덕사IC로 나가 21번 국도를 타고 예산, 아산 방향으로 간다. 창소 네거리에서 좌회전해 신암면 추사고택 이정표를 따르면 된다. 입장료, 주차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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