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신화와 역사의 땅 .2] 신라의 숨결

  • 조진범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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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10   |  발행일 2018-04-10 제24면   |  수정 2018-04-19
五岳의 중심…삼국통일 기운 가득한 신라 화랑의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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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은 신라때 중사를 지냈던 오악 중 중악으로 김유신 장군과 원효 대사 등 신라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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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심지대사가 창건했다는 팔공산 중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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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팔공산 중암암 뒤에 있는 석굴.

팔공산은 ‘신라의 향기’로 가득하다. 신라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신라 ‘천년의 도읍’ 경주 인근인 데다 신령스러운 산의 모습이 신라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리라.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국가 단위 제사를 팔공산에서 지낸 게 이를 증명한다. 5악의 중심이 팔공산이다. 통일신라는 동쪽의 토함산, 서쪽의 계룡산, 남쪽의 지리산, 북쪽의 태백산과 함께 그 복판에 있는 팔공산에서 제사를 올렸다. 산신에게 올리는 제사로, 신라가 팔공산을 얼마나 신성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신라의 깨달음

팔공산이 ‘불교의 성지’가 된 것도 신라의 영향이다. 대부분의 사찰이 신라 시대에 지어졌다. 토속 신앙이 불교로 치환되는 과정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불교의 중심 인물은 원효대사, 의상대사, 심지대사다. 원효대사는 ‘해골물’로 잘 알려져 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하러 가던 중 해골에 괸 물을 마시고 “진리는 결코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다시 신라로 돌아갔다. 원효대사의 설화가 담긴 곳은 오도암이다. 청운대라 부르는 거대한 바위벽 아래에 있다. 팔공산의 명당으로 원효대사가 수도해 득도했다고 전해진다. 의상대사는 화엄종의 개조다. 당나라에서 화엄종을 연구하고 돌아와 10여개의 사찰을 건립했다. 심지대사는 ‘팔공산 불교’의 중흥을 이끈 스님이다. 신라 헌덕왕의 왕자로 15세에 출가해 832년 동화사를 중창했다. 또 834년은 은해사에서 가장 높은 산내 암자인 중암암을 창건했다.

삼국통일한 신라 국가적 제사 지낸 곳
화랑 김유신이 하늘에 삼국평정의 맹서
곳곳에 원효·의상·심지대사 관련 설화
‘돌구멍절’ 중암암 전국서 발길 몰리고
선덕여왕 향취 부인사는 매년 추모제


◆김유신, 삼국 통일의 전설

중암암은 신라를 상징하는 중요한 암자다. 삼국 통일의 주역 김유신 장군(595~673)의 전설이 서려 있다. 중암암에 오르는 길은 쉽지 않다. 가파른 산길을 쉼 없이 걸어 올라가야 다다를 수 있다. 그 옛날 이 길은 첩첩산중이었을 것이다. 이 험한 산꼭대기에 왜 암자를 지었을까. 중암암에 오르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굵은 땀을 흘리며 힘들게 올라온 보람이 있다. 절경이다. 물론 단순히 아름다운 경치가 암자를 세운 배경이 아닐 것이다. 암자를 세운 목적을 생각하면 짐작할 수 있다. 암자는 수행처다. 속인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이어야 한다. 중암암은 수행처로는 최고다. 중암암은 ‘돌구멍절’로 불리기도 한다. 암자에 이르는 길에 요새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바위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중암암을 오르는 길이 힘들지만 즐거움도 있다. 온갖 봄꽃이 반긴다. 진달래, 개나리, 산수유, 생강나무 꽃 등이 눈을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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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 부처’로 더 알려진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

중암암에 도달하면 재미있는 설화들이 먼저 눈에 띈다. 특히 중암암 해우소의 깊이와 관련된 설화가 미소를 짓게 한다. 통도사와 해인사, 중암암의 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사찰 규모를 자랑하는데, 중암암의 스님이 “우리 절 뒷간은 어찌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허풍을 쳤다. 벼랑의 바위 속에 만들어진 중암암 해우소가 얼마나 깊은지를 상상해볼 수 있는 이야기다.

중암암에는 ‘김유신 석굴’이 존재한다. 김유신 장군의 수도처로, ‘극락굴’로 불리기도 한다. 암자 뒤에 거대한 화강암 덩이가 층층이 얽혀 만들어진 석굴이다. 높이 4~5m, 폭은 1m 내외, 길이는 10m 내외다. 극락굴의 설명이 흥미롭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로 알기만 한다면 이 극락굴은 몸이 아무리 굵다고 해도 통과를 못하는 사람이 없고, 세 번을 돌아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소원이 이뤄진다는데 조금의 수고로움이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중암암에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다.


팔공산은 김유신 장군 때문에 신라 화랑의 성지가 됐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 따르면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돼 용화향도를 이끌었다. 진평왕 28년인 17세 때 고구려, 백제, 말갈이 국경을 침범하자 비분강개해 혼자 중악석굴에 들어가 하늘에 고하여 삼국을 평정할 것을 맹서했다. 4일이 지나자 갈옷을 입은 한 노인이 찾아와 “그대가 어린 나이에 삼국을 병합할 뜻을 품고 있으니 장하다”면서 비법을 가르쳐주었다. 17세 때 천하평정을 꿈꾸었다니! 자연의 기운을 받지 못하고, 공부에 지친 요즘 학생들의 처지가 새삼 딱하다. 중암암 인근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도하면서 마셨다는 장군수라는 약수터가 있다. 만년송으로 불리는 소나무와 삼인암도 볼 수 있다.

◆신라의 수수께끼

신라의 향기는 동화사와 파계사 사이에 위치한 부인사에서도 진하게 배어 나온다. 부인사는 TV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던 ‘선덕여왕’과 인연이 깊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이다. 부인사는 선덕여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설과 선덕여왕이 국난을 물리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창건했다는 설이 나돈다. 부인사에선 선덕여왕을 기리는 불교 제례가 해마다 열린다. 신라왕의 제사를 지내온 사찰은 부인사가 유일하다. 부인사는 어떻게 신라왕의 제사를 지내게 됐을까. 송림사도 다소 특이하다. 팔공산에서 보기 드문 평지형 사찰이다.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의미다. ‘수행’의 측면에서 보면 어울리지 않는 장소다. 대웅전 앞 중정 중앙에 자리 잡은 오층 전탑(보물 제189호)이 웅장하다. 신라 진평왕 46년(624)에 세워졌다.

글=조진범기자 jjcho@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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