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진단] 어느 보수주의자의 편지

  •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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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10   |  발행일 2018-04-10 제30면   |  수정 2018-04-10
14년 전 보수정당 위기 때
8%까지 바닥친 黨지지율
천막당사로 기적 이뤄냈듯
등진 국민마음 되돌리려면
철저한 반성·내려놓기 먼저
[화요진단] 어느 보수주의자의 편지
이재윤 경북본사 총괄국장

장문의 e메일이었다.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참고만…’이라는 문자메시지가 메일에 앞서 도착했다. ‘보수를 혁신하라’는 필자의 글에 밑줄 긋고 ‘How?’라고 쓴 영상문자도 함께 왔다. 그런데 참고만? 그는 지역의 고위공직자다. 신분을 밝히며 민감한 사안을 언급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이다. 며칠 뒤 How?에 대한 그의 답이 왔다. 제목은 ‘보수가 사는 길’. 신랄하고 비장했다. 작금의 보수를 향해 든 매서운 회초리였다.

이념의 틀에 가두는 듯해 미안하지만, 그는 살신보국(殺身報國)을 가슴에 품고 사는 진정 보수주의자다. 그의 삶이 그랬다. 그런 그가 ‘현재의 보수는 진정한 보수와는 먼 사이비 보수일 뿐’이라고 질타했다. ‘나라를 이 꼴로, 국민을 절망으로…, 뼈저린 반성과 개과천선은커녕 지속적인 절망만 안겨주고 있다’고 했다. 보수 본거지를 자처하는 대구경북의 리더들에게는 한 치의 인정사정도 없었다. ‘고소영, 영포라인, 수첩공주… 온갖 기득권에 매달린 욕심쟁이’ ‘패거리 정치로 온 국가를 적폐청산의 재물로 헌납’ ‘그러고도 뼈저린 반성 없이 쪼그라든 기득권을 지키려고 연연’하고 있다고 꾸짖었다. ‘절박한 안보·경제위기에 대안 제시는 고사하고 대응조차 못하고 헛발질만 하는 게 자칭 보수세력의 현주소’라고 탄식했다. 그래서 ‘국민 앞에 겸허히 반성하고, 용서를 빌고, 다시 태어나겠다는 희망과 비전을 보여주는 것이 먼저’라고 했다. 덧붙여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해온 기존의 행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보수가 사는 길은 명료했다. ‘기득권을 내려놔라’. 철저한 ‘반성’과 ‘내려놓기’로 보수부활의 불씨를 살려야 한다는 충고였다.

8%. 2004년 3월 한나라당의 지지율이다. 더 이상 추락할 곳 없는 밑바닥이다. 최악이라 자조하는 지금 보수정당 지지율의 반토막도 안 된다. 불법 대선자금 폭로, 대통령 탄핵 소추 역풍 때문이었다. 그것도 17대 총선을 20여일 앞둔 시점. 이때 등장한 게 박근혜의 ‘천막당사’다. 박근혜는 당대표 취임 첫날 당 간판을 내려 천막당사로 옮기고 개혁을 주도했다. 국민은 재기의 기회를 줬다. 기적과도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선거 당일 국민은 출구조사에 깜짝 놀라고, 출구조사+20석이나 더 얻은 한나라당의 의석수에 또 한 번 놀랐다. 이후 보수정당은 각종 선거에서 연전연승했다. 박근혜는 선거의 여왕에 등극했다.

천막당사는 꽁꽁 언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녹였을까. 천막당사에 담긴 메시지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바로 ‘반성’과 ‘내려놓기’였다. 20여일 전과 선거 당일 한나라당의 본질이 뭐가 그리 달라졌을까마는, 천막당사가 의미하는 철저한 반성과 내려놓기의 절박함이 국민에게 전달된 것이다. 이런 ‘정서적 지지’는 종종 ‘정책적 선호’보다 우선한다. 지난해 대선만 해도 그랬다. 20대에서조차 문재인 후보의 정책선호도(15.1%)는 꼴찌 수준이었다(서울대 한규섭 교수 연구팀). 안철수 후보(48.6%), 유승민 후보(17.8%), 홍준표 후보(16.8%)보다 낮았다. 문 후보는 정책대결에 앞서 정서적으로 이미 국민의 마음을 얻은 후였다.

지금의 보수정당에도 과감한 반성과 내려놓기가 절실하다. ‘천막당사 시즌II’는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불과할까. 여전히 꽃가마만 타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국민 마음을 얻겠는가.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한국당 혁신위가 ‘천막’의 문을 빼꼼 열다 말았다. 국회의원 특권 내려놓기다. 이것만 과감히 했더라도 ‘다시 마음 돌려달라’고 호소할 자격이 있다. 불체포특권, 면책특권 주변을 맴돌다 주저앉은 것이 못내 아쉽다. 100가지가 넘는다는 국회의원 특권을 과감히 던져보라. 국민 마음을 얻기에 충분한 호소력이 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다. 여당(與黨)인들 어찌 반대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여당이 앓는 소리를 할수록 힘을 얻는다. 국회의원 특권내려놓기는 보수만 사는 길이 아니다. 우리 정치가 한 발 진보하는 길이다. 국민도 그런 정치와 함께 하고 싶다. 아직 시간이 있다.
이재윤 경북본사 총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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