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공산-신화와 역사의 땅 .3] 고려의 흔적

  • 조진범 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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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4-17   |  발행일 2018-04-17 제24면   |  수정 2018-04-19
독좌암·파군재·지묘동…팔공산 지명마다 고려 왕건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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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 동구 지묘동 신숭겸 장군 유적지에 있는 표충단. 신숭겸 장군이 왕건을 대신해 죽은 곳으로 조선 선조때 경상도관찰사 유영순이 폐사된 지묘사 자리에 단을 건립했다고 한다. 뒤에 왕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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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우왕 때 지었다는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국보 제14호)에 모셔진 526분의 나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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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전투에서 견훤에게 패한 왕건이 도망가면서 잠시 쉬었다는 독좌암(獨座岩).

고려에게 팔공산은 어떤 의미였을까. 고려 태조 왕건은 팔공산에서 후백제 견훤에게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다. ‘동수대전’ 혹은 ‘공산전투’로 불리는 싸움에서 왕건의 군대는 전멸되다시피 했다. 왕건은 겨우 목숨을 부지해 탈출했다. 고려 입장에서 한(恨) 서린 땅이다. 그런데 생각을 달리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팔공산은 고려에게 다가간다. 왕건이 ‘팔공산 신령’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고려는 팔공산을 신성시했다. 고려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이규보는 팔공산의 ‘공산대왕’에게 수차례 제례를 올렸다. 신라시대 영산(靈山)이었던 팔공산의 위상은 고려시대에도 변함이 없었다.

◆곳곳에 남아 있는 왕건의 흔적

팔공산 일대의 지명들이 고려의 역사를 증명한다. 독좌암, 파군재, 지묘동 등등. 팔공산에서 왕건의 뼈아픈 패배를 연상케하는 이름들이다. 불로동을 거쳐 팔공산으로 가는 길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왕건의 자취가 ‘독좌암’이다. 봉무정 앞 언덕 아래에 있는 큼직한 바위가 독좌암이다. 개천가에 있다. 거무튀튀해 금방 찾을 수 있다. 견훤 군사들의 포위망을 탈출한 왕건이 잠시 앉아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바위다. 독좌암을 지나면 동화사와 파계사로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파군재’ 삼거리다. 파군재는 ‘군대가 깨진 고개’라는 뜻이다. 왕건이 견훤에게 무참히 패배한 고개다.

파군재 삼거리를 지나면 바로 지묘동이다. 지묘(智妙)는 ‘지혜로운 묘책’이라는 의미다. 신숭겸이 왕건으로 변장해 어가를 타고 적으로 돌진해 죽었다. 왕건을 대신해 죽은 전략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사실 팔공산도 동수대전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동수대전에서 신숭겸, 김락 등 8명의 충성스러운 장수가 순절했다고 해서 ‘공산’에서 ‘팔공산’으로 부르게 됐다.

927년에 벌어진 동수대전 혹은 공산전투는 대구 동구 팔공문화원에서 만화책으로 낼 정도로 유명한 전투다. 왕건과 견훤이 천하의 주인이 되기 위해 패권을 다툰 건곤일척의 승부. 왕건은 참담하게 무너졌지만 결국 후삼국의 통일대업을 이뤘다. 전장의 이슬로 산화한 충성스러운 신하들이 통일의 밑바탕이 됐다. 신숭겸, 김락, 전이갑 등 8명의 장수와 5천여 군사의 희생으로 고려는 똘똘 뭉쳤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공산전투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장수들은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인물이 됐다.

지묘동 왕산 아래의 ‘표충사’는 신숭겸 장군을 모시는 곳이다. 평소 조용하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면 바로 신숭겸 장군상을 만날 수 있다. 말 위에서 활을 당기고 있는 모습이다. 장군의 기개가 느껴진다. 오른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신숭겸 장군이 순절한 장소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표충단과 순절지비 비각이 있다. 왕 대신 죽음을 선택한 장수.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시대의 흔적일 것이다. 명분보다 실리가 우선시되는 요즘 시대에선 더이상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가뜩이나 두명의 전직 대통령이 수감된 상황이다. ‘측근들의 배신’이라는 단어가 곧잘 등장하면서 묘하게 대조를 이룬다.

신숭겸 장군의 설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견훤이 왕건 대신 죽은 신숭겸의 머리를 홧김에 차버리자 신숭겸 장군과 생사고락을 같이했던 말이 신숭겸 장군의 머리를 물고 전남 곡성의 태안사까지 달렸다고 한다. 신숭겸 장군은 전라도 곡성 출신이다. 태안사 인근에는 현재 ‘장군단’으로 불리는 묘소가 존재한다.

후백제에 무참하게 패한 파군재 삼거리
잠시 앉아 휴식한 큼직한 바위 독좌암
신숭겸의 지혜로운 묘책 빛난 지묘동

고려시대 팔공산은 불교 개혁의 태동지
지눌스님 영천 거조암서 선불교 실천
삼국유사 일연스님은 고승과 인연 나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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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바위 부처’로 더 알려진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31호).

◆고려의 아픔을 품은 땅

고려는 몽골의 침입으로 큰 고초를 겪었다. 몽골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이었다. 1231년에 시작된 몽골의 침입은 30여년간 계속됐다. 고려의 민초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232년 팔공산 부인사에 있던 초조대장경이 소실됐다. 초조대장경은 거란의 침입을 막아달라며 1078년에 완성한 대장경판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이다. 이규보는 ‘대장각판군신기고문’에 “심하도다. 몽골의 침략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정이야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인데 심지어 어리석고 아둔함 또한 짐승보다 심하다. 부인사에 갈무리했던 대장경판본을 남김없이 쓸어버렸으니 나라의 큰 보배를 잃어버렸다”며 초조대장경 상실의 슬픔을 표현했다. 몽골이 팔공산 깊은 산속에 있는 부인사에 불을 질렀다면 그 과정에서 겪은 민초의 어려움은 상상조차 어렵다. 팔공산 인근의 고려 백성들은 1254년 차라대(車羅大)가 이끄는 몽골 주력부대의 침입으로 처절하게 무너졌다. 몽골군에 항전했던 민초들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 몽골 군사들의 잔혹함을 피해 ‘공산성’으로 들어가 삶을 도모했지만 제대로 목숨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산성에 들어갔던 수많은 사람이 죽어 사라졌다. 지금 공산성은 흔적만 남아있을 뿐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있다.

◆고승의 활약

고려시대 팔공산은 불교 개혁의 태동지였다. 조계종의 종지를 밝힌 중천조(重闡祖)로 숭앙받는 지눌 스님이 팔공산 은해사 말사 거조암과 인연을 가졌다. 지눌 스님은 거조암에서 참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을 지향하는 선불교를 실천함으로써 고려불교의 혁신을 꾀했다. 지눌 스님은 거조암에서 권수문(勸修文)을 만들었다. 거조암이 조계종의 발원지로 통하는 배경이다. 국보 14호인 거조암의 ‘영산전’에는 석조 나한상이 있다. 부처님의 10대 제자와 16성 및 오백 나한 등 526명의 실존 성인들이 모셔져 있다. 친근한 인상이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거조암은 옛날부터 ‘오백나한절’로 불렸다. 일연 스님도 팔공산권에 등장한 고승이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은 1292년 고려 국존이 됐던 혜영 스님을 비롯해 팔공산권에서 중요한 위상을 갖는 고승들과 인연을 나눈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글=조진범기자 jjcho@yeongnam.com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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