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草綠經 (초록경)

  • 이춘호
  • |
  • 입력 2018-04-25   |  발행일 2018-04-25 제30면   |  수정 2018-04-25
매화 딛고 벚꽃으로 간 봄
이제 深綠으로 깊어진다
생성이란 실은 소멸의 꽃
이 찬란한 신록의 봄날
죽음 잘 성찰해봐야 할 듯
[동대구로에서] 草綠經 (초록경)

무술년 4월 초. 나의 밤은 불면이었다. 그 곁에 아버지의 ‘임종(臨終)’이 놓여 있었다. 그 묵중한 시간 앞. 난 별로 슬프지도 않았고 슬퍼할 이유도 없었다.

너무나도 잔정이 없었던 당신. 이젠 한 덩이 무정한 살점으로 병상에 누워 있다. 숭고해 보이기도 했다. 숱한 인연,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지금은 혈족 옆에서 격한 숨 한 자락으로 겨우 버틴다. 87년간 들고 다녔던 육신. 새벽비가 내리고 있었다.

중환자실에선 노메이크업. 패션도 쓸 데 없다. 중환자들의 아픔 역시 그렇게 특별난 게 없다. 무감각해진 의료진에겐 너무 흔한 일상. 매뉴얼대로 흘러간다. 약이 환자를 돌보는 것 같다. 한쪽에선 지고 또 한쪽에선 신생아가 방긋 햇살처럼 피어난다.

동공에 핏발이 서 있고 초강력 피곤에 쩔어 있는 당직의. 반쯤 감은 두 눈을 앞세우고 내게 연명치료를 할 건지 묻는다. 난 “치료는 열심히 하겠지만 연명치료는 거부한다”고 말했다.

연명치료를 더 받을 수 없는 아버지. 점점 저승톤으로 돌아눕는다. 당신의 모든 근육이 조금씩 물속 닥나무 껍질처럼 나풀나풀 다 해체된다.

혈액 내 산소량 수치가 60 이하로 곤두박질한다. 곁에 있던 15년 경력의 간병사는 임종이 임박한 것 같다고 했다. 순간 아버지는 해저 지진처 같은 경련을 터트린다. 그리고 이내 심연처럼 재처럼 가라앉는다. 아버지의 맥박을 찾아 보았다. 그 어디에도 없다. 맥박과 숨이 증발해버린 몸. 아버지는 방금 바다로 스며들어간 강 줄기 같았다. 담당의가 혈족이 보는 앞에서 사망을 선언했다.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의 낙마. 문재인정부의 8번째 인사 참사가 터지던 날. 나와 59년 동고동락했던 당신은 저승으로 갔다. 죽음의 카니발이 또 하나 첨가됐을 뿐 지구의 자전과 공전은 이하동문이었다.

유품을 정리하면서 뒤늦게 난감한 슬픔과 직면할 수 있었다. 당신의 지갑에 꼬깃 동면을 취하고 있는 지폐 몇 장과 병원에서 입고 계셨던 티셔츠 뒷덜미에 묻은 기름때 때문이었다. 생전의 당신보다 몇 십배 큰 울림을 줬다. 현실보다 추억이 더 거대해 보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로 태어나 훗날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각자가 된 부처. 그는 ‘제행무상(諸行無常)’ 그리고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설파했다. ‘이게 이것이라고 확신할 만한 그 무엇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 ‘만사에 영원한 실체가 없다’는 걸 가르쳤다. ‘생사일근(生死一根)’임을 설파했다.

지금도 누가 돌아간다. 그건 슬픔이 아니라 실은 하나의 ‘축제’인지도 모른다. 본래 자리로 가지 못한 혈족이 망혼을 더 염려한다. 하지만 자기 자리로 간 그 망혼이 되레 지옥 같은 시간을 살아내야 할 혈육을 더 안타깝게 생각할 것 같다.

49재를 시작할 즈음, 내가 살던 앞산의 산색은 찬란하고 무릉도원을 방불케 했다. 그 숲에선 죽음을 감지할 수 없었다. 몇 달 전만 해도 죽음 같았던 저 앙상한 나무. 그가 저런 황홀경을 펼쳐내다니. 필시 죽음이 삶의 시간과 연동됐기에 가능한 천의무봉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제주도의 수선화와 유채꽃, 남해안의 동백꽃 딛고 솟구친 매화, 그 위에서 가야금처럼 활활거렸던 벚꽃 전선이 사라지자 비슬산 참꽃이 여름으로 건너갈 푸른 이파리를 여러 장르로 칠해주고 있었다. 하나의 초록이 아니었다. 오만 가지의 초록, 그게 화성악처럼 조율되고 있다. 이 찬란함! 난 그걸 ‘초록경(草綠經)’이라고 명명하고 싶었다.

담록(淡綠)에서 심록(深綠)으로 건너가는 이파리들이 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당신의 망혼도 쉬 그 안으로 틈입해 가는 것 같았다. 짐승의 시간을 뒤로하고 난 다시 인간의 시간으로 귀환했다.

어느 곳에선 죽음이 또 어느 곳에선 삶이, 갑과 을처럼 으르렁거리지 않고, 편견도 우열도 없이 다정히 4월 산하를 장엄하게 편집 중이었다.

이춘호 주말섹션부 차장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