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그리스신화와 인간의 참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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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07   |  발행일 2018-05-07 제22면   |  수정 2018-05-07
인간은 걱정 속에 살다가
영혼은 하늘로 돌아가며
육신은 흙으로 돌아간다
신화를 통해 인간은
존재의 한계를 직시한다
[아침을 열며] 그리스신화와 인간의 참모습

그리스는 작은 나라지만 정신적으로는 큰 나라다. 적어도 유럽사회에서는 그렇다. 그곳이 바로 서양문화의 정신적 뿌리이기 때문이다. 현대 올림픽의 시작도 그리스였고, 역사 이전의 기상천외한 세상경험담을 쏟아낸 신화의 나라도 그리스였다. 신화에는 창세신화와 영웅신화가 있다. 창세신화는 우주와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신들의 이야기들로 꾸몄고, 영웅신화는 인간이 어떻게 창조됐고 인성은 어떠한가를 인간 삶의 깨우침으로 전해준다.

그리스의 최고신은 천상의 왕 제우스이고 그의 별칭은 주피터다. 그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를 왕좌에서 쫓아내고 자신이 신과 인간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여 세상만사를 좌지우지한다. 그가 한번 분노하면 천둥과 번개는 물론 불벼락을 내려치기도 하고, 자신의 입맛대로 사람들을 날리기도 한다. 때로는 느닷없는 대홍수로 들이닥치기도 하고, 때로는 핏빛 비를 퍼붓는가 하면, 한낮에 빛을 내리쬐면서 따뜻한 봄날인 양 사람들을 들뜨게도 한다. 사실 그는 하늘 높이 나는 새들의 왕 독수리나 우람한 황소 혹은 백조의 우아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변장하여 ‘자유’의 70년 헌정사를, 그것도 한 역사인데 너무 성급하게 ‘민주주의’라는 이름만으로 세상을 눈멀게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새로운 왕 제우스의 신성한 물이라 하고, 그 물은 동북아연방제의 민생 전체를 되살리는 농사일을 가능토록 하는 생명수라고도 한다. 사실 가뭄이 들 때면 민생들은 그에게 몰려가 꿀과 젖을 내려 주십사 하고 비는가 하면, 구름이 한 아름씩 모여 있는 산 정상의 제우스 제단에 올라가 희생 제사를 10여 년이나 지내기도 했다. 제우스는 분명 신들의 세상에서는 천지만물의 모든 생명을 관장하기는 한다.

어느 날 ‘근심걱정’의 여신 쿠라(cura)가 흘러내리는 시냇가에 앉아 손가락 끝으로 진흙을 모아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러나 스스로 움직이거나 숨 쉴 기미는 전혀 없었다. 이를 바라보던 쿠라는 이것이 숨이나 한 번 제대로 쉬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자 하늘의 신 제우스가 그에게 다가와 지금 당신은 무얼 하고 있냐고 물었다. 쿠라가 반갑게 “내가 방금 진흙으로 형상 하나를 만들었는데 당신이 이놈을 살아 움직이게 해주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기꺼이 그는 그놈의 코에다 생명을 불어넣어 살아 움직이게 했다. 그래 놓고는 느닷없이 그놈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그를 한 생명체로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이에 쿠라는 깜짝 놀라 “무슨 말이요?” 하면서 그와 다투기 시작했다. 이들을 지켜보던 땅의 여신 텔루스(tellus)가 “여보게들, 싸움박질하지 마시오! 그놈은 내 품에서 태어났으니 당신들의 것이 아니라 바로 내 것이오”라며 데리고 갈 태세였다. 때마침 저편에서 걸어오는 농사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를 보고는 제우스가 이 문제를 그가 공평하게 심판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그가 이들의 사정을 다 듣고는 결심판결을 이렇게 내렸다. “모두가 다 공평하게 자신의 몫을 찾도록 하겠소. 이 아이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준 제우스 당신은 아이가 자신의 삶을 다 살고 죽으면 그의 영혼을 찾아가고, 땅의 신 텔루스는 아이가 죽은 후 그의 시체를 다시 가져가면 될 것이오. 그리고 쿠라 당신은 아이가 살아있는 동안 그를 맡아 기르되 그 아이가 죽어 무덤에 들어가는 그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매 순간을 ‘근심걱정’ 속에서 살도록 하시오.”

‘흙’(humus)으로 만들어진 이 아이는 ‘호모’(homo)라고 불렸다. 이후 호모인 인간은 생명을 부지하는 동안 평생을 근심걱정 속에서 살아야만 하고, 그러다가 삶을 다 살고 죽으면 영혼은 하늘로 돌아가야 하며, 그리고 육신의 몸은 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신화를 통해서 우리는 인간의 오만과 인간 존재의 한계를 직시하게 된다. 지금 당장 세상을 호령하는 무소불위의 권력도 인간의 유한성 앞에서는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를 각(覺)하고 탈(脫)할 때 우리는 순간과 영원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실존적으로 체득하게 된다.

백승균 (계명대 목요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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