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길과 흙의 길 사이 나는 매 순간 죽고 산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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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18   |  발행일 2018-05-18 제33면   |  수정 2018-05-18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도예가 운당 김용득
가마에 불 치는 건 욕망 잠재우는 과정
절체절명 순간 불이 되고, 흙이 되기도
고려때 반짝하고 사라진 ‘동화 도자기’
日 진사와 다른 도자기 구현한 ‘장엄경’
평생 쏟아부어 나만의 ‘동화’ 부활·복원
“불의 길과 흙의 길 사이 나는 매 순간 죽고 산다”
편리함과 가격경쟁력 때문에 모두들 가스가마를 선호하지만 김용득 도예가는 모든 공정을 자신이 책임지는 장작가마를 운명처럼 품고 갈 수밖에 없다. 지난 7일 남짓 불을 땔 때 그 역시 불자락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가마 칸 옆으로 난 측창으로 장작을 넣고 있는 운당 김용득.<사진=운당 김용득 제공>

한밤에는 달, 대낮에는 태양. 그게 문득 ‘그릇’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 손금을 가엾게 훔쳐본다. 뭘 하자고 생긴 손모가지인지…. 아직 난 손과 흙 사이를 표류하고 있다. 손이 흙으로 건너갈 길이 아직 멀었다는 말이겠지.

새삼 불과 흙의 기막힌 인연에 대해 궁리해 본다. 불이 흙을 만나지 못했어도 흙이 불을 만나지 못했어도 문명(文明)이란 놈은 필시 제 길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공(陶工)은 불의 길과 흙의 길 사이에서 매 순간 죽는다. 완성되면 거기에는 불도 흙도 없다. 서로를 위해 완전하게 죽어줘야 ‘천품(天品)’이다. 천품의 소유권은 도공한테 있지 않다. 세월과 역사의 몫이 된다. 도예(陶藝). 그것 참 기막힌 싸움이다. 가마에 불을 친다. 흙을 태우는 게 아니다. 내 욕망을 잠재우는 과정이다. 완전히 못 태우면 흙은 절대 도자기로 피지를 못한다. 그러니 실용의 도자기가 아니다. 나는 ‘구원(救援)의 도자기’를 말하려 하는 것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 정점에선 도공도 불이 되고 흙이 된다. 내가 도자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도자기, 그 조탁(彫琢)의 길. 궁극의 그릇은 영성을 획득한다. 바람이 부딪히면 ‘귀곡성(鬼哭聲)’을 풀어낸다. 가마와의 전쟁. 피곤이 분기탱천할 때쯤 거울에 비친 날 봤다. 사람의 형용이 아니다. 영판 ‘봉두난발한 귀신’이다.

작품을 하는 도공은 지금 다들 절벽과 마주하고 있다. 1997년부터 한국 도예계는 작품에서 상품도자기 시대로 쓰러진다. 유명해져야 팔린다. 유명하다는 게 뭔가. 정부로부터 인간문화재란 칭호를 받아야 하는데 솔직히 나도 명장 신청을 해놓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속은 편하지 않다. 국보급 도자기에 장인의 이름이 있는가. 과연 우리 도예인은 자기 이름을 내세울 정도로 제 길을 가고 있는지.

암석은 삭아서 흙으로 피어난다. 흙이라고 다 흙이 아니다. 고령토처럼 도공과 동고동락해야 되는 흙이 별처에 따로 숨어 있다. 난 산청 등 지리산권 흙과 인연이 깊다. 유약에 이용될 재도 평생 못다 사용할 양을 확보해 놓았다. 전국은 가스가마 춘추전국시대. 모든 과정을 수작업으로 하고 직접 장작가마를 움직여 자기가 원하는 작품을 빚는 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내가 사는 김해도 마찬가지다.

예순을 넘겼으니 나도 흙을 구워댄 지 얼추 40년이 넘어선 것 같다. 그런데도 난 아직 밥 문제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질 못했다. 아들(진욱)이 가업을 잇고 있는데 그의 미래가 어떠할지 나도 장담 못하겠다. 4월 28일 오후 6시30분. 가마에 불이 들어갔다. 지난 3일 오전 8시 생활도자기 수백 세트를 끄집어냈다. 작품용은 2개월에 한 번 만든다. 허리도 좋지 않은 아내가 구석 자리에서 주문받은 생활도자기 등을 포장하고 있다.

고요한 밤. 혼자 작품실에 앉아 분신이랄 수 있는 동화요변(銅畵窯變·이하 동화) 도자기와 대화를 나눈다. 고려 때 잠시 반짝하고 사라진 동화 도자기. 비취색과 붉은빛이 오로라처럼 혼융된, 어쩜 도자기로 구현된 하나의 ‘장엄경(莊嚴經)’인지도 모른다. 다들 동화를 일본판 진사(辰砂)로 단정할 때 나는 평생을 쏟아 그걸 부활·복원시켰다. 동화와 진사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 게 우리 도예계의 현실이니 누굴 탓할 수 있겠는가.

나는 1955년 겨울, 경남 김해시 진례면 송정리(청곡부락)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음양오행론적으로 볼 때 난 토(土) 기운이 압도적이다. 옆집에 산 외할아버지. 그 역시 가마를 가진 옹기장이였다. 가마는 놀이터였다. 흙과 사금파리는 장난감이었다. 가마에 불이 들어가면 난 쉬 집에 가지 못했다. 가마가 석류알처럼 물고 있는 잉걸불. 바람의 세기와 주위 온도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색깔이 달라진다. 자연 공부는 멀어졌다. 진례국민학교 2학년 때 중퇴했다. 가난 때문이다. 양식이 떨어져 부잣집 꼴머슴이 되기도 했다. 동생까지 챙겨야만 했다. 동네밥도 얻어먹었다. 그래서 난 한글을 익히지 못했다. 난 그게 부끄럽다. 하지만 나를 아끼는 이들은 자랑스럽게 여긴다. 어쩜 내 문맹(文盲)이 내 예술혼의 원천인지도.

더 나은 길을 모색했다. 꼴머슴보다 옹기 기술자로 돌아섰다. 일년에 쌀 세 가마니를 급료로 받았다. 하지만 나를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를 ‘점놈’으로 불렸다. ‘점방직원’이란 말이다. ‘장이’가 가장 멸시받던 시절이었다. 만약 날 이끌어 준 스승이 없었다면, ‘밥벌레 김용득’으로 빌어먹었을 것이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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