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의 고장 청송 .1] ‘안동권씨 청송 입향조’ 권명리와 그의 손자 권효량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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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23   |  발행일 2018-05-23 제15면   |  수정 2018-05-30
세조의 왕위 찬탈후 권효량은 病을 핑계로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20180523
안동에 살던 권명리가 난을 피해 입향한 청송 안덕면 문거리 마을. 문거리 입구에는 큼직한 돌을 시원스레 쌓은 누석단(累石壇)과 금줄을 두른 당산나무, 그리고 ‘문거(文居) 마을유래’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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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효량이 세종 20년 식년시에서 병과 3등으로 급제했다는 내용이 기록된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시리즈를 시작하며= 청송은 천혜의 자연과 함께 유서 깊은 역사가 공존하는 고장이다. 특히 역사의 중심에 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인재향(人材鄕)으로 손꼽힌다. 퇴계 이황을 배출한 진성이씨와 세종의 정비 소헌왕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청송심씨 등 명문가들이 청송에 뿌리를 두고 있다. 또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청송에 거주한 인물을 열거해 놓은 ‘청기지’에는 선정(先正)·유현(儒賢)·학행(學行)·유행(儒行)·문행(文行)·행의(行誼) 등 20개 항목에 걸쳐 833명이 실려있다. 무엇보다 청송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의병을 일으켜 충(忠)의 정신을 실천한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이러한 청송의 올곧은 정신문화는 시대와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독특한 유무형 자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동시에 인재들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가 지역 곳곳에 산재했다. 역사의 중심에 선 인물과 그들의 이야기는 청송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태어나 청송이 함께 공유한 소중한 유산이자 ‘미래 청송’을 이끌어갈 원동력이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매주 한차례 청송의 역사와 인물,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는 ‘인재의 고장 청송’시리즈를 연재한다. 1편에서는 청송에 입향한 안동권씨 권명리와 세조의 왕위찬탈 후 더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권효량에 대해 다룬다.

고려 우왕 10년 亂 피해 문거리에 온 권명리
西厓가 일화 남길 만큼 어릴 때부터 비범
탁월한 재산관리로 안덕에 강력 기반 구축
친·외손 모두 지역서 손꼽히는 사족 발전

승정원 주서로 4년여 왕의 곁 지킨 권효량
‘곧은 성정과 학식, 촉망받았던 인재’ 방증
전랑·옥당·중서사인 관직기록 일부 誤記
아들 권간 ‘안덕의 학자’·효자로 이름나


사방 가까이 둘러선 산을 가르며 고개를 오른다. 청송 안덕과 현동을 잇는 산길이다. 그러다 문득 샛길 하나가 남쪽으로 빠져나가며 넌지시 읊는다. ‘문거리’. 길에서 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마을 숲이 반짝거리는 베일처럼 동네를 감추고 있다. 숲에는 큼직한 돌을 시원스레 쌓은 누석단(累石壇)과 금줄을 두른 당산나무, 그리고 ‘문거(文居) 마을유래’ 표지석이 있다. 글월 문(文)에 살 거(居), ‘글 읽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문거리다.

#1. 청송에 입향한 ‘권명리’

당산나무의 짙은 그늘을 통과하자 뜻밖의 환함에 탄복한다. 남북으로 긴 땅이 거의 평지에 가깝다. 마을을 품은 산들은 그리 높지도 그리 가깝지도 않은 순한 능선으로 이어져 대지는 자못 넉넉한 빛을 머금고 있다. 옛날 이곳에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여흥민씨(驪興閔氏), 평산신씨(平山申氏), 함안조씨(咸安趙氏) 등이 살았다고 한다. 언제부터인지는 대부분 알 수 없지만, 그들 중 제일 먼저 안동권씨가 이 땅에 들어온 것은 고려 우왕 10년인 1384년이다.

그는 조선 초 사옹원(司饔院) 직장동정(直長同正)을 지낸 권명리(權明利)다. 안동 동문 밖 용흥리(龍興里)에 살던 권명리는 난을 피해 청송 안덕면 문거리로 왔고 이후 그의 집안은 안덕 일대에 세거하게 된다. 그의 시조는 태사공(太師公) 권행(權幸)으로 고려 창업에 큰 공을 세워 태조 왕건으로부터 권(權)씨 성을 하사받았다. 파조는 권형윤(權衡允)이다. 고려 말 급사중(給事中) 또는 전서(典書)를 지낸 인물로, 급사중은 임금이 하는 일의 득실을 간하는 요직이었고 전서는 옛 정무부처의 장관이었다. 권명리는 권행의 15세손, 권형윤의 5세손이다.

권명리는 소년시절부터 비범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에 대해 서애(西崖) 류성룡(柳成龍)이 안동도호부의 읍지인 ‘영가지(永嘉誌)’에 소개한 일화가 있다.

권명리는 18세 때 왜구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한 처녀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피란 온 정승집의 딸이었다. 그는 처녀를 잘 보호해 무사히 부모에게 돌려보냈다. 처녀의 부모는 딸과 권명리 사이에 남녀의 사귐이 있었으리라 짐작하고 결혼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권명리는 그러한 사실이 절대 없었음을 맹세하고 사양했다. 그는 세도가의 어려운 형편을 틈타 장가드는 것을 옳지 않게 생각했고 후세에조차 그러한 말이 전해지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안덕 일대에 입향 세거한 권명리는 재산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탁월한 능력을 보이며 강력한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이에 그의 아들과 사위 그리고 친손과 외손이 모두 청송을 중심으로 지역을 넓혀가며 사족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의 아들은 자용(自庸)·자공(自恭)·자성(自誠)이 있다. 맏아들 자용은 세종 때 안음현감·청하현감·진보현감을 지냈고, 자공은 사직(司直), 자성은 원종공신다대포진사 만호(原從功臣多大浦鎭事 萬戶)의 관직에 있었다.

#2. 세조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은 ‘권효량’

권명리 맏이 자용의 아들은 권효량(權孝良)이다. 그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다. 권효량은 1412년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되며 이후는 다만 세종 20년인 1438년 급제해 훗날 예문관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오르기까지의 공식적인 기록 몇 개가 남아있을 뿐이다. 청송군은 그가 거친 관직을 ‘이조·호조 전랑, 좌랑, 옥당(玉堂),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청송군지에는 ‘양전(兩銓)좌랑(佐郞)’ 즉 이조와 병조의 좌랑을 지냈다는 내용이 있으며, 그 외 집현전 학사를 거쳤다는 문중 기사와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를 지냈다는 논문이 있다. 이 중 전랑(銓郞)은 이조와 병조의 정5품관인 정랑(正郞)과 정6품관인 좌랑(佐郞)의 통칭이므로 약간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또한 중서사인은 고려시대의 관직이므로 오기(誤記)로 보인다. 옥당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으로 성종 1년인 1470년에 집현전을 계승해 설치되었으므로 집현전 학사가 옳을 듯하다.

권효량의 출생연도는 사실 정확하지 않다. 다행히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와 동갑’이었다는 청송군지의 기록을 볼 때 태종 12년인 1412년으로 상정할 수 있다. 그는 세종 20년 식년시(式年試)에서 병과(丙科) 3등으로 급제했고 세종 24년인 1442년 6월에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가 되었다. 주서는 승정원일기의 기록과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서의 기능을 겸한 관직으로 정7품 중 가장 우대되고 지위가 높았다. 또한 장래의 장상(將相)이라거나 승지(承旨)라는 촉망을 받으면서 왕의 최측근에서 근무했기에 성정이 곧고 학식이 탁월한 인물에게 제수되었다. 권효량은 세종 28년 5월까지 꽤 오랜 시간을 임금 가까이에서 주서로 일했다. 이후 권효량은 세종 31년인 1449년에 병조좌랑(兵曹佐郞)에 오른 것으로 짐작된다.

문종 1년인 1451년에는 정5품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오른다. 인사를 담당하는 중요 관직이었다. 그해 문종은 신하들을 각지에 보내 전세(田稅)를 불법 징수하는 것을 몰래 순찰하게 했는데, 권효량(權孝良)은 충주(忠州)로 파견됐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 이후 그는 직제학에 올랐고, 세조의 왕위찬탈에 죽음으로 맞선 사육신 하위지와 함께 강론하기도 했다.

권효량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마지막 기록은 ‘세조 1년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는 것이다. 공신 목록에 기재된 그의 관직은 종3품 부정(副正)이다. 당시 좌익원종공신은 2천300명에 이른다.

실록의 기록으로만 볼 때 권효량은 세조가 왕위에 오를 때 공을 세운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권효량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이후 칭병불사(稱病不仕), 즉 병을 핑계로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신으로 녹훈됐지만 실제는 세조의 왕위찬탈에 분개해 임금의 부름에 나아가지 않은 것이다. 이는 그가 녹훈된 ‘원종공신’의 의미를 이해하면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원종공신은 직접적인 공훈이 있는 정공신(正功臣)의 자제나 사위 등에게 내려졌다. 하지만 공로포상의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불안한 정국에서 공신 책봉을 통해 국가나 왕실의 취약성을 보완하고 조정의 지지 세력을 광범위하게 확보하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세조가 지지 세력을 넓히기 위해 권효량을 공신으로 녹훈한 것으로 보인다.

칭병불사 이후 권효량의 생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시편 하나 찾을 수 없다. 은거한 곳도 알 수 없고,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도 모른다. 묘소도 실전되었다.

#3. 칭병불사 이후…

권효량의 손자 권희맹(權希孟)의 묘갈명(墓碣銘)에 따르면 권효량의 아들은 어모장군(禦侮將軍) 권상(權詳)이다. 훗날 희맹의 치적으로 아버지 권상은 공조참판(工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로, 어머니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정부인(貞夫人)으로, 증조 권자용은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그리고 할아버지 권효량은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관직이 추증(追贈)되었다.

2010년 후손들이 세운 권효량의 유허비가 강원도 횡성에 있다. 23세손 창은공(蒼隱公) 종길(宗吉)이 광해군의 난정을 만나 횡성에 은거한 이후 종손의 세거지는 횡성이 되었고 후손들은 파조 권형윤의 제단을 세거 산에 마련하면서 파조의 아들 이하 실전된 6위의 단비를 세웠다. 16대 권자용, 17대 권효량 부자의 유허비는 파조의 제단 서쪽에 나란히 서 있다.

#4. 지금 안덕에는…

청송에 입향한 권명리는 세종 후반까지 생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분배한 내용을 적은 ‘허여문기(許與文記)’를 남겼으며, 사위 손사성(孫士晟)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문거리의 안동권씨는 권명리의 증손자인 권간(權幹)의 내외손이 번성했다고 한다. 권간은 ‘청송 안덕의 학자’이자 효자로 이름나 있었으며 학봉 김성일의 왕고모부이자 아버지 김진의 스승이었다. 학봉은 권간의 집안을 통해 자신의 집안이 학문적으로 흥기했다고 여겼다. 17세기 이후 청송 안덕 일대는 권간의 손녀사위였던 함안조씨(咸安趙氏) 조지(趙址)의 후손들이 번성하게 된다.

지금 안덕에는 권명리와 그의 증손자 권간의 묘가 있다. 청송군지에 따르면 권명리의 묘는 ‘안덕면 문거리 해향(亥向)’에 있고 ‘서애 류성룡이 찬갈(撰碣)’했다. 권간의 묘는 ‘안덕면 문거리 묘향(卯向)’에 위치하며 ‘청계(淸溪) 김진(金璡)이 찬묘표(撰墓表)’했다고 전해진다.

손에 잡히는 그들의 자취는 없으나 마을은 예나 지금이나 글월 문(文)에 살 거(居), 문거리다. 옛날 옛날에 글 읽는 사람이 많았다는….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자문=김익환 청송문화원 사무국장

▨ 참고문헌= 청송군지. 안동권씨종보 139호, 486호. 조선왕조실록,

김학수, 영남학인 손덕승의 학자 관료적 성격, 퇴계학과 유교문

화, 2015. 손오규, 이문가 손사성과 지정조격, 유학고전의 현대적

조명, 2011. 한충희, 조선초기 승정원 주서 소고, 대구사학,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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