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에까지 도입된 가상현실 치료는 진짜다

  • 손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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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24 07:38  |  수정 2018-05-24 09:07  |  발행일 2018-05-24 제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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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현실(VR)은 질병의 치료 효율을 높여주는 새로운 무기다. 재활 치료의 효과를 높인다거나 우울증 환자들의 증상을 완화할 수 있다는 임상실험 결과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연합뉴스

편지 대필 작가 ‘테오도르’는 아내와 별거 중이다. 그는 타인의 마음을 전하는 게 직업이지만 정작 자신의 삶은 외롭고 공허하다. 어느 날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컴퓨터 ‘사만다’를 만나 조금씩 행복을 되찾는다. 2013년 개봉한 영화 ‘허(Her)’의 내용이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만다와 대화를 하며 위안을 얻고 점점 사만다를 사랑하게 된다.

가상현실(VR)로 마음을 치료하는 시대가 열렸다. 게임을 하듯 몸을 움직이면서 둔해진 신체 움직임을 회복한다. 아바타와 대화하고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면서 잘못된 감정·행동을 교정하기도 한다.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인 가상현실 치료를 소개한다.

삼성서울병원·삼성전자 등
우울감 줄이는 시스템 개발
치매·파킨슨병 등 질환 적용

이스라엘 텔아비브의대팀
뇌졸중 환자 VR 운동재활
치료후 이동거리 1.6㎞ 늘어

연세대강남세브란스 실험
공포증 극복에 효과 뛰어나
고소공포증지수 2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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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가 주목하는 VR

가상현실은 가상으로 만들어낸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기술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사용자가 디스플레이(HMD·head mounted display)를 머리에 착용하고 360도 영상을 체험한다. 과거 VR는 머리에 쓰는 디스플레이가 유선(有線)으로 본체와 연결돼 있어 움직이는데 제한이 크고 화질도 좋지 않아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기술개발로 몰입감을 높이고 어지럼증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5G(5세대 이동통신) 상용화와 함께 대용량 콘텐츠 전송이 빨라지고 고화질(HD) 수준의 게임 영상 화질도 구현되면서 콘솔(비디오)·PC용 게임산업에 VR가 적극 활용되고 있다.

현실감이 높은 비디오 게임 정도로만 생각하던 가상현실은 의료의 영역에도 접목되고 있다. 현실과 유사하게 구축한 인공적인 환경에서 사람과 컴퓨터가 상호 작용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요 대학병원을 중심으로 가상현실 치료를 현장에 적용하는 곳이 늘고 있다.

삼성서울병원과 국내 기업인 삼성전자·CJ어트랙션 공동 연구팀은 최근 우울증, 불안감,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VR 바이오피드백 시스템’을 개발해 공개했다. 이 시스템은 고글처럼 생긴 VR 기기를 착용한 채 우주선처럼 생긴 의자에 앉아 가상현실 속에서 스트레스를 줄이고 불안감을 극복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긴장을 이완하고 심리적으로 편안한 상태에 이르도록 돕는데 집중한다.

가상현실 치료의 효과는 강력한 몰입감에서 나온다. 인간이 받아들이는 감각 정보의 70%가 눈을 통해 들어오는 것을 감안, 시각을 장악해 치료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여기에 청각·촉각·후각적 요소를 추가하면 몰입감을 높일 수 있다. 현실이 아닌데도 그 상황에 놓여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의료계에서 가상현실 치료가 활발하게 적용되는 분야는 뇌졸중·치매·파킨슨병 등 퇴행성 뇌 질환이다. 신체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을 막는 재활 훈련과 사고 트라우마나 공포증, 게임·알코올 중독 등 뇌에서 잘못 인식하고 있는 감정·행동을 교정하는 인지행동 치료를 한다.

가상현실은 지루하고 힘든 재활 훈련에 재미를 더해준다. 바다 속에서 물고기를 잡거나 건널목 신호에 맞춰 길을 건너고 마트에서 장을 보는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신경을 회복하고 근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기계적 치료를 즐거운 놀이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재미로 몰입감 높여 공포증 치료

가상현실 치료 효과는 실제로 증명된다. 이스라엘 텔아비브의대 교수 연구팀이 2009년 한쪽 하반신이 마비된 뇌졸중 환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기존 재활 치료와 가상현실 운동 재활 치료의 효과를 비교한 결과 가상현실 운동 재활 치료군은 이동 거리가 치료 전 1.2㎞에서 치료 후 2.8㎞, 보행속도는 초속 0.53m에서 0.63m로 늘었다. 반면 기존 재활 치료군은 큰 변화가 없었다.

가상현실의 장점은 안전한 공간에서 문제 상황을 시각화한다는 것이다. 불편한 기억이나 상황을 가상현실이 눈앞에서 강제 소환해 트라우마를 치료한다. 현실에서라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불안·공포 감정이 커져 가능한 피했을 일을 가상현실에 반복 노출해 극복할 수 있다. 눈을 감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는 것 자체를 피하는 환자의 반응 통제도 수월하다. 이 때문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나 불안·발표 장애, 고소공포증 치료에 효과적이다.

연세대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의학과 김재진 교수팀은 고소·발표 공포증이 있는 사람 82명을 대상으로 2주 동안 8차례에 걸쳐 해당 가상현실을 체험하게 하고 공포증의 불안 심리 완화 정도를 분석했다. 이들은 사방이 트인 엘리베이터를 타고 20층·40층·60층 오르기, 초고층 건물 옥상 걷기, 높은 산 중턱에 걸쳐있는 구름다리 건너기, 상사와 식사, 3대 1 취업면접, 프로젝트 발표 등의 상황을 가상현실로 체험했다.

가상현실을 이용한 공포증 극복 효과는 뛰어났다. 고소 공포 완화 훈련 대상자의 87.5%(35명), 발표 공포 완화 훈련 대상자의 88.1%(37명)의 불안감이 줄었다고 응답했다. 고소공포증지수(AQ)가 가상현실 치료 전 48점에서 치료 후 36.7점으로 평균 23.5% 개선됐다. 발표공포증 역시 사회적 상호 작용 불안척도(SIAS)가 치료 전 35.4점에서 치료 후 28.8점으로 평균 18.6% 감소했다.

VR 기술은 20년 전 미국에서 참전 군인들의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치료하기 위해 처음 개발됐다. 국내는 2005년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공포증을 치료하기 위해 처음 도입한 후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재활의학과에서 VR 기술을 재활치료에 접목한 건 2~3년 전부터다.

가상현실 치료를 이용할 때 주의할 점도 있다. 장시간 이용하면 눈으로 보는 것과 뇌로 판단하는 것의 차이가 누적돼 시각적 피로감을 유발한다. 어지럼증·구토·메스꺼움 같은 부작용을 겪는다면 즉시 휴식을 취해야 한다.

손선우기자 sunwoo@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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