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걸 교수’의 오래된 미래교육] 수평적 시간과 수직적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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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28 07:58  |  수정 2018-05-28 07:58  |  발행일 2018-05-28 제17면

샤르트르는 ‘존재와 무’라는 책에서 인간을 제외한 즉자적 존재에게는 오직 현재만이 있고, 대자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과거와 미래가 있는데, 이것이 다른 존재에 비해 인간이 우월한 점이라고 했다. 그러나 과거와 미래를 왕복하는 삶이 과연 우월한 것일까? 과거와 미래를 왕복하는 삶에서 새로움은 항상 두려움과 긴장을 준다. 그 두려움과 긴장은 매일 매순간이 똑같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직 현재만이 있는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새롭다. 매순간 매일 매주가 항상 새롭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시간의 영역에서는 매일이 가을이다. 싹을 틔우고 성장하고 하는 기다림이 없다는 뜻이다. 가을의 시간에서 우리가 수확해야 할 것은 매순간의 현재다. 우리가 현재에 머무르는 순간만 수확의 대상이라는 뜻이다. 과거와 미래를 왕복하는 순간은 결코 수확할 수 없다.

‘요가 수트라’에서는 과거와 미래를 왕복하는 시간을 ‘수평적 시간’이라고 하고, 현재에 머무르는 시간을 ‘수직적 시간’이라고 했다. 수평적 시간에서 수직적 시간으로 바꾸는 것은 삶에 있어서 완벽함이 아니라 전체성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완벽함과 전체성은 어떻게 다른가? 완벽함은 수평선에서 움직인다. 왜냐하면 완벽함은 지금 여기가 아니라 미래 언젠가 도달해야 할 것인 반면, 전체성은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쇼 라즈니시는 예수 십자가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수평적 시간을 수직적 시간으로 바꾸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수직적 시간에는 완벽함뿐만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자아도 존재하지 않는다. 엔소니 드 멜로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은 플루트의 텅 빈 속이 필요하고

글씨는 지면의 여백이

빛은 창문이라는 빈 자리가

거룩함은 자아의 부재가 필요하다.’

인류는 구석기라는 오랜 기간 수직적 시간 속에서 살다가 신석기문명과 함께 수평적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인류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문명은 다시 수직적 시간을 회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반문명론과 같이 문명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추구해야 할 미래의 탈현대 문명과 문명 이전의 구석기 시대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 아직 자아가 형성되지 않아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은 점,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물활론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 과거와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살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문명 이전의 세계와 탈현대 문명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원래 부자인 사람과 모든 것을 잃었다가 다시 그것을 회복한 사람의 차이와 같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 박이문은 ‘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이라는 책에서 “오늘의 과학기술 문명이 아무리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하더라도 과학 지식과 기술을 버린다는 것은 마치 목욕통의 땟물을 버리려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아기까지 버리는 것과 유사하다”고 했다.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떠날 때의 그 사람이 아니다. 새로운 것을 보았고, 고통을 느꼈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알았기 때문이다. 두 개의 똑같은 점이 있다. 하나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점이고, 또 하나는 멀리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온 점이다. 두 점은 같지만 그 안에 있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하나는 그냥 점이고 또 한 점은 설렘과 충만으로 가득한 점이다. 수평적 시간의 삶을 살다가 수직적 시간을 회복한 사람의 삶 역시 설렘과 충만으로 가득하다.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누구를 만나게 될까, 무엇을 보게 될까? (대구교대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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