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인물열전’ .3] 청년 재산가 서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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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5-31   |  발행일 2018-05-31 제29면   |  수정 2018-06-15
경북 전역에 땅…협박받은후 적잖은 쌀 기부
소작인이 진심 몰라준다 하소연
광복직후 콜레라로 목숨 잃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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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듬해인 1946년 대구의 최고 부자로 알려진 서병국의 집에 맹견을 해치고 건국사업에 재산을 바치라는 협박장을 꽂아둔 뒤 사라지는 사건이 잇따랐다. (영남일보 1946년 3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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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술대회 1등 현금 20원, 씨름 1등 광목 한 필’.

1934년 6월 대구 화원에서 원유회가 열렸다. 원유회는 사람들이 들이나 산에서 어울려 즐기는 모임이다. 말하자면 억눌려 사는 지친 일상을 하루쯤 내려놓는 것이다. 이날 원유회에는 궁술을 포함해 씨름, 행운권 추첨 등이 있었다. 궁술에서 우승하면 현금 20원을 주고 씨름에서 이기면 경성방직에서 생산하는 태극성 광목을 수여했다. 이런 상금의 마련은 부자들의 몫이었다. 대구의 청년재산가 서병국은 선뜻 50원을 내놨다. 이 대회는 동아일보 대구지국이 주최했다.

조선인 부자들은 자발적인 성금 외에도 갖은 기부금에 시달렸다. 일제는 지역별 지주들을 대상으로 금품을 수시로 거둬들였다. 전재민 구제에 지원을 요구하면 응해야 했고, 조선인 병자들을 돕기 위한 기부에도 나서야 했다. 뿐만이 아니다. 전쟁비용을 대는 국방헌금도 외면할 수 없어 나라 뺏긴 설움을 톡톡히 맛봐야만 했다. 서병국은 이런저런 기부금을 내는 데 빠지지 않았다.

서병국은 그 당시 청년재산가로 불렸다. 말하자면 청년재벌이자 지주였다. 그의 땅은 경북 전역에 고루 퍼져 있었다. 1930년 2월 경북 김천군 감천면 지좌동의 한 농가에 불이 나 마당에 쌓아둔 벼 600여석을 태운 일이 있었다. 잿더미로 변한 벼의 주인은 바로 서병국이었다. 소작료로 받아 놓았던 벼였다. 그때 시가로 1만2천여원에 달했다. 그는 고령에도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다. 그의 땅에서 농사를 짓는 소작인만도 300여명 이었다. 심지어 그의 소작농이 되도록 해주거나 두세를 뜯어내는 사기사건이 일어날 정도였다.

‘지난번 부내 남정 서병국씨 댁에 어느 사이 괴인물이 들어와 그 집의 수호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맹견 2두를 독살하고 협박장을 단도로 벽에 꽂아두었다는 것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서씨 댁에서는 다시 맹견 2두를 구해왔던바 그 후 또 다시 맹견 2두가 어느새 죽어버려서 서씨는 물론 일반부호가의 잠자리를 불안케 하고 있다.’ (영남일보 1946년 3월16일자)

광복이 된 이듬해 서병국의 집에 괴한이 두세 차례 침입했다. 집을 지키던 덩치 큰 셰퍼드를 해치고 협박장을 꽂아놓은 사건이 벌어졌다. 협박의 내용은 지금까지 벌어놓은 재산을 건국도상의 조국을 위해 쓰라는 내용이었다. 단순히 금품을 훔치기 위해 들어온 강도사건은 아니었던 셈이다. 대낮에도 괴한이 침입하자 진골목에 몰려 살던 부자들은 잠자리를 설칠 정도로 안절부절못했다.

광복 직후에는 이렇듯 부자들을 상대로 재산헌납을 요구하는 일이 가끔씩 일어났다. 극심한 경제난에 대한 분노가 일제 때 돈을 많이 번 부자들을 향해 표출되기도 했던 것이다. 서병국의 집에서 발생한 맹견 독살과 기부 협박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는 기부 요구를 받은 뒤 적지 않은 양의 쌀을 내놨다. 그럼에도 며칠 뒤에는 쌀 50가마니를 집 안에 숨겨놓은 것이 드러나 당국에 압수당하는 수모까지 당했다.

서병국은 일찍이 부자가 됐다. 물려받은 재산에다 경제적인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광복된 조국에서의 삶은 짧았다. 1946년 5월부터 번진 콜레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청년재산가의 삶은 거기서 멈췄다. 그는 일제강점기 때 소작인들이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한다며 하소연했다. 광복 후 그의 진심을 확인할 기회가 없었던 게 못내 아쉽다.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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