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도시 달성을 가다 .1] 대구교육의 뿌리 달성

  • 임훈,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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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4 07:40  |  수정 2018-06-11 07:44  |  발행일 2018-06-04 제13면
달성, 대구 사액서원 5곳 중 3곳 보유…도동서원 국내 5대 서원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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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도동서원 중정당의 모습. 강학 공간으로 사용된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다. ‘중정(中正)’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중용(中庸)의 상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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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입구에 자리한 은행나무. 400여 년 수령의 은행나무는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인 한강 정구 선생이 도동서원 중건 기념으로 심은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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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 유물전시관. 전시관에서는 서원에서 사용했던 제기류를 비롯해 한훤당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시와 글 등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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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군 현풍면 상리 현풍향교. 현풍항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758년(영조 34년) 당시 현감이던 김광태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 시리즈를 시작하며

대구시 달성군이 교육도시로 떠오르고 있다. 달성군은 1995년 경북도에서 대구시로 편입된 이래 급격한 인구증가와 산업 발전을 거듭 중이다. 특히 달성군은 지난해 전국 82개 군부 중 인구 1위를 기록했으며, 신도시 곳곳에 새 학교가 들어서는 등 학령인구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교육에 대한 군민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높고, 지역의 교육여건은 개선되고 있다. 달성군은 촘촘한 장학서비스와 지속적인 영어교육 사업을 통해 우수 학생 지원·육성에 힘쓰고 있다. 대구 도심의 고교가 달성군으로 이전하는 등 긍정적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또한 달성군에는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을 비롯한 각 대학의 캠퍼스가 자리해 과학기술인재 양성의 요람으로 변모 중이다. 이 밖에도 평생·농업교육 등 일반인을 위한 교육사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에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은 달성군의 교육콘텐츠를 재조명하고 각각의 교육 사안에 대한 변화상을 소개하는 ‘교육도시 달성을 가다’ 시리즈를 연재한다. 시리즈 1편에서는 달성의 옛 교육기관과 교육의 역사에 대해 다룬다.

달성 소재 서원은 모두 10곳
구지면 도동리의 도동서원은
김굉필 학문·덕행 기려 설립
대원군 서원철폐령 때도 무사
강학 관련 자료·유물 등 많아

현풍면 상리 자리한 현풍향교
조선시대 지방공립학교 역할

#1.대구 교육의 뿌리

달성은 대구 교육의 뿌리를 가진 고장이다. 도동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과 향교가 자리해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현재의 사립학교 격인 서원은 선현을 모시는 제향과 인재를 양성하는 강학의 기능을 겸한 공간으로 조선시대 교육의 한 축을 담당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근대교육이 정착되면서 서원의 강학 기능은 사라졌지만, 성리학의 이상향을 꿈꾸던 선비들의 흔적은 여전하다.

달성에 위치한 서원들은 대구의 정신문화와 민족 교육의 산실로서 큰 역할을 해 왔다. 달성에만 총 10곳의 서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중 3곳이 사액서원이다. ‘사액서원’의 사전적 의미는 ‘편액을 하사받은 서원’이라는 의미로 조선시대 왕으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을 뜻한다. 흥미로운 점은 대구지역 사액서원 5곳 중 3곳이 달성에 위치해 있다는 것. 도동·낙빈·예연서원이 여기에 해당된다.

특히 소수·병산·도산·옥산서원과 함께 ‘국내 5대 서원’으로 꼽히는 구지면 도동리의 도동서원이 유명하다. 도동서원은 1605년(선조 38년) 지방 유림들이 조선 전기 유학자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568년(선조 1년) 한훤당을 모시는 서원이 유가면 쌍계리에 쌍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지만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가 중건을 거쳐 지금의 도동서원이 됐다.

한훤당은 영남학파의 종조인 점필재 김종직의 문하다.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로 칭할 정도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으며, 조선 전기의 개혁가 조광조의 스승이기도 하다.

한훤당과 달성의 인연은 깊다. 한훤당의 외가가 현풍면 지리(못골)이다. 서울 정동에 살았지만 생전에 달성에서 거주한 적이 있으며, 도동서원 인근에는 그의 묘소도 자리하고 있다.

도동서원 중건에 참여한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역시 조선 예학의 대가로 꼽히는 학자다. 한강은 정몽주·정여창·김굉필·이언적·이황 등 영남오현(嶺南五賢, 영남 출신의 다섯 현인)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다. 한강은 한훤당의 외증손으로, 도동서원 앞에는 400여 년 전 한강이 도동서원의 중건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 거대한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도동서원 곳곳에서 학문을 숭상하는 옛사람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강학 공간으로 사용되는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다. 강당의 명칭인 ‘중정(中正)’은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중용(中庸)의 상태를 뜻한다. 대청 기단 앞에는 탁자처럼 생긴 정료대(庭燎臺)가 자리하고 있다. 상석 위에서 불을 피워 제례 등을 지낼 때 조명으로 사용한다. 중정당 오른편에는 향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제물을 검사하던 장소인 생단(牲壇)이 자리하고 있다. 중정당 뜰 양쪽으로는 유생들이 기거하던 거인재와 거의재가 자리하고 있다. 서원 맨 뒤편 사당에서는 한훤당과 한강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2.달성에서 조선시대의 교육을 엿보다

도동서원은 한훤당과 한강의 학맥이 이어지는 교육의 전당이었다. 도동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훼철되지 않아 강학과 관련한 많은 자료가 남아 있다. 육영재완의절목(育英齋完議節目)과 같은 고문서를 통해 조선시대 영남지역의 교육활동을 생생하게 가늠해 볼 수 있다. 육영재완의절목은 1787년 현풍현감으로 부임한 조정현이 작성했다. 조정현은 이 문서에서 ‘이 완의는 육영재 창설의 뜻을 밝힌 것으로 영재를 양육하고자 함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18세기 달성 현풍 지역의 강학 활동에 대한 지역민의 관심을 보여주는 자료로 손색이 없다.

도동서원의 중건과 운영에 큰 관심을 가졌던 한강은 서원의 원규(서원의 내부 규칙)를 제정했다. 한강집속집(寒岡集續集)에 도동서원의 원규가 전해진다. 그 내용이 사뭇 엄격하며, 조선의 인재양성 과정과 목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원장을 존중할 것’ ‘신진을 영입한다’ ‘강습을 부지런히 한다’ ‘어진 선비를 예우한다’ 등의 원규가 있다. 도동서원 입구의 유물전시관에서는 서원에서 사용했던 제기류를 비롯해 한훤당의 학문적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시와 글 등을 전시, 유서 깊은 서원의 전통을 알리고 있다.

이 밖에도 달성 곳곳에 산재한 교육 관련 유적을 통해 학문을 숭상하던 옛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현풍면 상리에 자리한 현풍향교 역시 교육 기능을 담당했다. 향교는 조선시대의 공교육을 책임지던 지방 공립학교다. 현풍향교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758년(영조 34년) 당시 현감이던 김광태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현풍향교는 대구향교·칠곡향교와 더불어 대구의 공공교육을 책임지는 장소였다. 현풍향교의 배치는 일반적인 향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향교 중심부에 강학 공간인 명륜당이 위치해 있으며, 그 앞으로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해 있다. 또한 달성지역에는 각 가문의 학문과 교양을 닦은 장소인 정사(精舍)를 비롯해 기초 교육을 담당하던 서당(書堂) 등이 산재해 있어 인재양성에 애썼던 향촌의 내력을 엿볼 수 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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