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사천시 대방동 삼천포대교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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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6-08   |  발행일 2018-06-08 제36면   |  수정 2018-06-08
삼천포에 빠질 수밖에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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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선∼삼천포대교. 가운데 섬이 모개도로 앞쪽의 사장교는 삼천포대교, 뒤쪽의 아치교는 초양대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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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조선. 1970~80년대 전성기를 지나 이제 폐선 처리장이 되어 있다.

삼천포대교가 허공을 가르며 활공한다. 모개도에 살짝 착지하는가 싶더니 이내 초양도를 향해 날며 초양대교로 모습을 바꾼다. 그 곁에 서로를 바라보기 좋을 만큼의 거리를 두고 조약돌 같은 해상케이블카가 하늘을 가른다. 모두 까마득한 새처럼 소리가 없다. 한 점으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새처럼 이제 삼천포는 없는데, 노상 ‘삼천포 간다’고 한다. 가면, 아직은, 삼천포가 있다.

사천시 대방동-남해군 창선도 연결
창선-삼천포대교 명칭놓고 분쟁세월
모개도·초양도·늑도 3곳의 섬 지역
5개교량과 육지 연결…총길이 3.4㎞

케이블카 정류장 등 삼천포대교공원
조선소 잔해만 남은 대방마을 골목길
짙은녹음 우거진 수군쉼터 대방군영숲
이순신이 거북선 숨긴 요새 대방진굴항
굴항입구, 그믐날 동제 745년 느티나무


◆ 삼천포대교

경남 사천시 대방동(大芳洞), 오늘의 삼천포다. 삼천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다. 세금으로 거둔 쌀을 운반하기 위해 창고를 설치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삼천리라는 마을이 생겼다. 개성까지 물길 따라 삼천리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진성을 쌓고 방어기지로 활용하면서 삼천진이 되었다. 삼천포라는 지명이 본격적으로 쓰인 것은 1918년이다. 이후 1995년 삼천포와 사천이 통합돼 사천시가 되었다. 이제 삼천포라는 지명이 사라진 지 20년이 넘었다. ‘국민학교’ 세대에게 ‘초등학교’는 정말 어색한 이름이었다. 민망하게도 ‘국민학교’가 목구멍에 걸려 되삼켜지는 데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삼천포에게도 그런 시간이 올까.

삼천포대교는 사천시 대방동과 남해군 창선도를 연결하는 ‘창선-삼천포대교’의 일부다. 각기 다른 모양과 형식의 삼천포대교, 초양대교, 늑도대교, 창선대교, 단항교 5개의 다리가 모개도, 초양도, 늑도를 디딤돌 삼아 이어진다. 총길이는 3.4㎞로 1995년 착공해 2003년 개통됐다. 사천시와 남해군은 교량의 명칭을 두고 한 세월 냉전의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결국은 양 지역의 명칭을 따서 ‘창선-삼천포대교’라고 명명됐다. 섬 쪽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반영한 것이라 한다. 삼천포대교는 대방마을과 모개도를 잇는다. 모개도까지가 대방동이다.

삼천포대교 입구 서쪽에 ‘삼천포대교공원’이 있다. 삼천포대교를 바라보라는 넓은 조망대라 할까. 들어서면 다만 주차장인가 싶은데 주변으로 관광안내센터, 케이블카 정류장, 작은 미술관, 화장실과 매점, 음악분수, 거북선 모형, 야외무대, 회 센터 등등이 들어서 있다. 자동차들은 꼼짝없이 태양에 붙잡혀 이글거린다. 잔교에는 몇몇 낚시꾼들이 쭈그리고 앉아 있고 더 많은 구경꾼들이 서있다. 바닷가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물살을 가르고 미끄러지는 커다란 배도, 다리 위를 씽씽 달리는 차들도 소리가 없다. 뛰어다니며 까르르대는 아이들의 소리조차도 어딘가로 흡수되어 버린다. 바다 때문인지 태양 때문이지, 그들로 인해 깜깜해진 내 감각 탓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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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 군영숲.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이곳에 주둔했던 수군기지의 군사들이 훈련하고 쉬던 곳이다.

◆ 대방 군영 숲과 옛 조선소 거리

삼천포대교 동쪽 아래는 숲이다. 팽나무와 느티나무 등의 활엽수 몇 그루가 있는 작은 숲이지만 그늘이 아주 짙어 나무가 수백 그루는 되는 듯하다. 대방 군영 숲, 일명 군인 숲이라 부른다. 안내판에 의하면 ‘고려 말 우리나라 연안을 빈번이 침범하던 왜구의 노략질을 방비하기 위해 설치한 수군 기지가 있었고 상주하던 군인들이 이 숲에서 훈련하고 쉬었다’고 한다. 나들이 나온 사람들이 돗자리를 펴고 앉아 있다. 젊은 엄마가 짙은 녹음과 환한 해변의 경계에 서서 소리친다. 삼천포에서 처음 들은 경쾌한 소리다. 내려다보니 아이들이 얕은 바다에 발을 담그고 물놀이하고 있다. 바로 옆 해변에는 폐선 한 척이 정박해 있다.

숲에서 나오면 대방마을 골목길이다. 몇몇 식당을 지나면 오래되고 낡은 건물들이 좁은 골목을 그리고 있다. 옛 조선소 거리라 한다. 높은 담장의 조선소는 지금 폐선처리장으로 바뀌었고 주변에는 조선소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다. 조선소는 1970~80년대가 전성기였다. 현재 사천시에서는 점점이 남아 있는 소규모 조선소들을 한곳에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 가느다란 전주에 몸을 한 번 숨겨보겠다는 듯 콘크리트 벽이 서있는데 거기에 ‘해원조선’이란 이름이 희미하게 적혀 있다. 몇 걸음 뒤 ‘해원조선’ 사무실이 영화처럼 나타난다. 벽에는 금이 가고 미닫이문은 낡았지만 박공의 삼각 이음새는 완벽하고 나무판에 새겨진 조선소 이름은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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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굴항 석축에 우뚝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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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진굴항. 고려 말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한 군항 시설의 하나로,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거북선을 숨겨두었다고 한다.

◆ 대방진 굴항

해원조선소 옆의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간다. 폐허와 같은 해변이 열리고 오래 공들여 보듬어 옴 직한 집 한 채가 바다를 향해 앉아 있다. 다시 바닷가를 따라 훤한 시멘트길이 이어지는데 곧 촘촘하게 쌓인 석축 위로 울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외부에서는 그저 멋진 숲으로 보이지만 계단을 올라 보면 눈이 동그래지고 입이 딱 벌어진다. 비밀의 요새다, 신선의 보석이다, 대방진굴항(大芳鎭掘港)이다.

굴항은 고려 말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한 군항 시설의 하나였다.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 거북선을 숨겨두었다가 지나가는 왜선을 침몰시켰다고 한다. 현재의 굴항은 조선 순조 때 진주 병마절도사가 진주목 관하 73면의 백성을 동원해 만든 것으로 1820년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300여 명의 수군과 전함 2척이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굴항 북쪽에는 수군장이 거처하는 동헌과 많은 관사들이 수군촌(水軍村)을 이루었고, 쌀과 잡곡 2만여 섬을 저장한 창고도 있었다고 한다. 굴항은 지금 주민들의 선착장이고 주변은 민가다.

굴항 입구에는 대단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수령이 무려 745년이다. 높이는 15m, 둘레가 9m에 이른다. 동네 사람들은 매년 섣달 그믐날 목욕 재개하고 동제를 울린다고 한다. 좁장한 수로가 느티나무 앞을 지나면서 점점 둥글게 부풀어 굴항을 이룬다. 그래서 석축과 푸른 숲에 안겨 숨은 굴항은 미끈한 곡옥이다. 자루 달린 표주박이나 풍선 같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이 굴항 석축에 우뚝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 높은 곳에서 내내 지켜보고 계시겠지요.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여행정보

45번 중부내륙고속도로 창원 방향으로 가다 내서분기점에서 10번 남해고속도로 진주 방향으로 간다. 진주 지나 사천IC에서 내려 3번 국도를 타고 삼천포로 간다. 삼천포대교 건너기 직전에 빠져나가 삼천포대교공원에 주차하면 된다. 주차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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